수화는 언어다-35만 청각장애인의 정체성에 관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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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는 언어다-35만 청각장애인의 정체성에 관한 보고

by 정진한 2006.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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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똘레랑스> 이영경 작가입니다.
이번에 "수화는 언어다-35만 청각장애인의 정체성에 관한 보고"라는 제목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수화를 언어로 인정하라는 움직임은 농아인협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져 왔지만 세간에 잘 알려지진 않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청각장애인의 인권과 더불어 그들의 언어인 수화에 대해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홍보문 첨부하오니 읽어 보시고 기사화 시켜도 되겠다 싶으시면 연락주세요. 관련 사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영경 작가



■ 프로그램 : 똘레랑스
■ 방송시간 : 5월 25일 (목) 밤 11시 ~ 11시 50분
■ 진행 : 손석춘
■ 연출 : 김민태 / 김원직
■ 구성 : 이영경 / 우선영



※ 기획의도


수화는 그 안에 희노애락은 기본이고 풍부한 뉘앙스까지 표현할 수 있는 독립된 언어입니다. 청각장애인에게는 소리 대신 시각으로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는 손말, 즉 수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사렛대학 국제수화통역과 안영회 교수(청각장애2급)


수화는 손으로 하는 말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화는 언어라는 짧은 문장에 담긴 뜻을 비장애인들은 과연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 땅의 청각장애인 35만 명.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청각장애와 그들의 언어인 수화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진정으로 수화를 언어로 인정한다면 청각장애인들이 사회 곳곳에서 수화통역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막 방송 등의 활성화로 정보접근에서 소외되지 않을 것이며 교육, 직업 선택 등에서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똘레랑스는 그동안 청인(廳人)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수화(手話) vs 구화(口話) 논란’을 통해 청각장애인들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더불어 수화가 언어로서 인정받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필요한지 선진국의 사례를 조망함으로서 그 대안을 살펴본다.



◆ 주요 내용


한국 방송 사상 최초로 ‘수화(手話) vs 구화(口話) 논란’ 접근 !


# 구화 논쟁 제 2 라운드 - 인공와우 수술

인공와우(人工蝸牛)란 소리를 뇌로 전달해 주는 달팽이관이 제 기능을 못할 때 인공적으로 달팽이관에 전극을 삽입하는 일종의 ‘인공 귀’. 고가의 이 수술이 올해부터 건강보험이 적용되면서 수술을 받는 환자가 부쩍 늘었다.
농아인들의 언어인 수화는 버리고 부모님의 욕심으로 수술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수술을 받는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기계를 몸에 지니고, 다칠까봐 고장날까봐 마음껏 뛰놀지도 못하는 이 아이들에게 부작용이라도 생기면 누가 책임집니까?
-한국농아인 협회 변승일 회장


듣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는 듣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새로운 과학기술문명을 거부할 이유가 없으며, 인공와우 수술을 통해 소리를 되찾는 것을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
-한국난청인 가족협회 김주훈 회장

농인사회의 오랜 화두는 바로 수화, 구화 논쟁이다. 즉, 농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그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해 수화를 기본 언어로 해야 한다는 입장과 주류 사회와의 통합을 위해 고도의 훈련을 통해 말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되어 온 것.

이와 같은 농인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갈등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것이 바로 와우시술이다. 이 수술로 인해 농아인들의 귀가 열리고 말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한층 높아진 셈이다.

제작진이 방문한 강남의 한 이비인후과 병원. 성공 사례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휴일 이른 아침부터 수술대에 오르는 청각장애 아동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의료계에 따르면 수술은 언어습관이 형성되지 않은 2-3세 유아기 아동에게 적합하다고 주장, 실제로도 환자의 대부분은 어린이들이다. 그러나 수술을 하고도 효능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심지어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제작진이 이들을 직접 만나 그 차이를 확인했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툼이라도 나서 아이가 말을 제대로 못하고 ‘어어..’하고 손짓 발짓을 하면 애들이‘너 바보야? 말 못해?“그래요. 심지어 부모들까지도‘아줌마 얘 바보 아네요? 얘 빨리 데리고 집에 가세요.’ 그럴 땐 민감해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가슴 무너지더라고요.
- 6세 청각장애 자녀를 둔 김은화 씨 (32세)

아이에게 곧 인공와우 수술을 시킬 생각이라는 김은화씨. 그는 아이에게 수화대신 눈물겨운 노력으로 구화를 가르친다. 이는 북미 선진국에서 청각장애를 발견한 부모들이 수화 교육을 받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다르다. 그 차이를 미국의 가정과 비교해 취재했다.


# 농교육 현장에 수화가 없다

청각장애학생들을 가르치는 현장인 한 농학교를 찾아 고교생들의 글짓기 실력을 테스트해 보았다. 놀랍게도 초중고 교육을 거친 이들의 문장 실력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 그러나 한창 지식을 습득해야할 학생들에게 수화가 능숙한 교사의 수는 역부족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수화 과목은 특수교육 교원 양성과정에서 필수 교과목이 아닌 선택과목이다. 졸업하더라도 현행 정책상 특수교사는 장애 전 영역을 통합하여 배출되기 때문에, 수화를 전혀 못하는 교사들도 농아학교에 부임할 수 있다. 게다가 뒤늦게 교육 현장에서 수화를 배우더라도 5년 마다 다른 장애 영역으로 순환배치가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간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학창시절 내내 선생님 입모양만 보고, 친구의 필기를 빌려보는 것이 지겨웠다는 박재현씨(25). 목사가 되려는 꿈을 안고 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수화통역사를 약속했던 학교 측은 비용의 문제로 약속을 번복했다. 3학년 까지 지루한 싸움 끝에 결국 그는 대학의 문을 스스로 나왔다.


# 원인은 청각장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


2002년 김미선 씨는 공장에서 작업 중 오른쪽 손가락 3지, 4지를 절단 당했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평범한 산재사고로 처리되었지만, 청각장애인 미선 씨는 수화를 하는데 꼭 필요한 손가락을 잃음으로 언어 기능에 장해를 입고 실직과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재심사를 요청한 그녀가 들은 것은 “수화를 하는데 꼭 양 손이 필요한가?”라는 답변 뿐. 평생, 불편한 손으로 대화를 해야 하는 미선 씨는 손가락과 함께 언어도 잃어버렸다.

청각장애인은 일상에서도 보이지 않는 장벽을 매일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전부터 수화통역서비스가 시행되고 있지만, 청각장애인 35만 명에 수화통역사는 700여명, 턱없이 부족한 인력이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마찬가지다. 지상파의 28%만 자막방송이 되는 실정. 농아인들이 정보접근에 차단된 것은 물론, 수화를 할 줄 모르는 가족들과의 관계에서도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기 어렵다.


# 먼 길을 돌아 수화를 배우는 청각장애인 - 수화로 되찾은 나의 정체성

구화를 배우고 자라 성인이 되어서 수화를 뒤늦게 접하고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시각으로 확실하게 확인하고 대화하다 보니까, 나는 시각으로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의사소통을 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문화를 가졌구나, 하는 내 정체감도 알게 되고, 사회성도 더 좋아졌어요.
나사렛대학교 국제수화통역과 안영회교수(청각장애2급)

안영회(40) 교수는 청각장애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일반인 못지 않게 말을 잘한다. 그녀가 일반인처럼 말을 잘 하게 된 것은 어린시절부터 계속된 어머니의 엄한 구화 훈련을 통해서라고 하지만. 그러나 의외로 안 교수는 수화예찬론자이다. 뒤늦게 성인이 되어 수화를 배우면서 수화 속에 담긴 청각장애인으로서의 정체감을 되찾았다는 안 교수.
아무리 구화를 배워도 청각장애인들은 정보를 청각화 했을 때 보다 시각화 했을 때 가장 편하다고 한다. 그녀는 수화를 청각장애인의 언어로 인정한다면 지금처럼 무분별한 인공와우수술에 너도 나도 몰려들지 않을 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 미국 - 수화가 제 2 언어로 인정되는 나라

한국에서는 작은 일 하나도 친구나 아빠의 도움 없으면 할 수 있는게 없었는데, 이곳에는 청각장애인들도 스스로 처리 할 수 있어요. 무료로 지급받은 화상전화도 있고, 자막 방송도 이뤄지고 수화통역서비스가 항상 가능하죠.
갈로댓 대학교 농학교 수석 졸업 정 훈씨 (33, 청각장애인)

워싱턴 D.C에 있는 농대학교 갤로댓 대학교. 모든 학과 개설이 농아인들에 맞게 되어 있고, 해마다 유수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 그야말로 농아인들에게는 꿈의 대학이다.
이곳 졸업식에서 제작진은 한국인 유학생 정훈씨를 만날 수 있었다.


정훈 씨는 이 곳 농학과를 수석 졸업한 재원이다. 그런 그도 유학 오기 전 한국에서는 열등생이나 다름 없었다. 미술에 취미가 있어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입시를 치뤘지만 수화통역사도 없이 치러진 면접 시험. 통과할 리가 없었다. 이곳 갤로댓 대학에서 4년 동안 성적 우수 장학금을 놓쳐본적 없는 정훈씨는 다짐한다. 충분한 지원만 있으면, 청각장애인도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한국농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미국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듯 모든 학생들이 교육 받을 동등한 권리가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장애를 가진 학생이건 수업을 듣는데서 어떠한 어려움도 없게 도와주는 것이 뉴욕대학교 장애센터 방침입니다.
뉴욕대학교 장애지원센터 스텝 팸 메이놀드

동등한 기회의 보장은 농학교라는 특수한 환경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제작진이 찾아간 뉴욕대학에서도 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장애지원센터에서는 모든 장애학생들을 위한 맞춤형 서비스를 항시 제공하고 있다. 수업에서 수화통역서비스 뿐만 아니라, 자막을 원하는 학생은 실시간 자막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다. 비단 수업 뿐만 아니라 뉴욕의 풍부한 문화적 환경을 즐길 수 있도록 학교 밖의 미술관이나 극장에서도 이러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이곳 학생들은 ASL과 영어 두가지 언어로 공부를 합니다. ASL(미국식 수화)은 청각장애학생의 제1언어이고 영어는 제2 외국어입니다.
뉴욕 제47 농아중고등학교 교장 마틴 포셔

저는 프린실라가 3살 반이었을 때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제 딸이 청각장애인이어서 수화를 배워야만 했습니다. 그 방법만이 그녀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린실라 (제 47 농학교 재학생, 청각장애인)의 어머니

뉴욕에 자리잡은 제47 농아중고등학교. 비장애와 함께 통합교육을 시키고 있지만, 청각장애아동을 가르치는 교사의 자질은 엄격하게 묻는다. 바로 수화를 통해 각 전공과목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제작팀이 만난 밝은 미소의 17세의 프린실라는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프린실라의 가족은 그녀의 장애를 알게 된 뒤, 수화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 대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인공와우수술을 권하는 의사도 있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프린실라의 결정에 달려있다고 믿는 가족들. 이런 분위기 속에 프린실라는 다른 비장애학생들처럼 말썽도 피우고, 의젓하게 공부도 하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청각장애가 있다고 해서 특별 대우도, 차별도 없이 사는 삶. 한국의 청각장애인들이 바라는 삶도 바로 프린실라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이 아닐까. 이 땅의 35만 청각장애인들은 오늘도 꿈꾼다. 수화가 언어로 인정되고 사용되는 그 날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 주요 인터뷰 ■

- 이유훈 / 교육인적자원부 특수교육과 과장
- 변승일 / 한국농아인협회 회장
- 김주훈 / 한국난청인가족협회 회장
- 김승국 / 한국표준수화규범 제정 추진위원회 위원장
- 권오일 / 평택 에바다 농학교 교감
- 신현기 / 단국대 특수교육과 교수
- 정정진 / 강남대 특수교육과 교수
- 정연훈 / 아주대 이비인후과 전문의
- 임성기 / 수화연구소 소장
- 배일도 / 한나라당 의원
- 로라프랭크 / 뉴욕 제47 농아중고등학교 교사



■ 주요 사례 ■

- 장우솔(6) / 청각장애아동, 인공와우수술 준비 중
- 박재현(25) / 청각장애인, 방송보조출연자 해고
- 김미선(40) / 청각장애인, 산재보상과정의 차별
- 박미라(39) / 청각장애인, 사이버대학교 수업 차별 및 일상에서의 차별
- 김희영(34) / 2005년 성공적 와우 수술 사례
- 조주영(10) / 2005년 와우수술
- 박명기(가명, 31) / 와우수술 부작용 후 제거 수술 받음
- 이현승(11) / 에바다 농학교 탁구부
- 안영회(40) / 나사렛 대학교 국제수화통역과 교수,
- 정훈(33) / 미국 갤로댓 대학교 농학과 수석 졸업생
- 뉴욕대학교(NYU) 장애지원센터
- 뉴욕 제47 농아중고등학교
- 프린실라(17) / 뉴욕 제47 농아중고등학교 학생

 

지난달 25일 서울 사직로 영락농인교회 목양실. 이영경(50) 사모가 남편 김용익(53) 목사에게 문을 열고 다가갔다. 김 목사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이 사모가 형광등 스위치를 껐다 켰다. 그제야 김 목사가 환한 얼굴로 사모를 맞았다.

김 목사는 청각장애인이다. 김 목사에게 이 사모가 “오늘 설교 준비는 다 됐느냐”고 물었다. 수화(手話)였다. “이사야서 41장 10절 말씀으로 묵상 중인데 하나님이 지혜를 안 주시네요.” 부부는 ‘소리 없이’ 크게 웃었다.

이 사모는 KBS 뉴스 등 방송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는 비장애인 수화통역사다. 대학 유아교육학과를 다니던 중 수화 동아리에 가입한 것이 계기가 돼 직업이 됐다.

“청각장애인 중에서도 1∼2급, 농아인이라고 불리는 분들이 수화를 사용합니다. 이들은 수화라는 언어를 가진 소수민족이에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농아인이 수화가 아닌 필담이나 구화를 하는 모습은 현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 사모는 “소리를 미약하게나마 들을 수 있는 청각장애인은 구화 사용이 가능하지만 전혀 듣지 못하는 경우엔 구화 습득이 어렵다”고 했다.

농아인의 모국어는 수화다. 비장애인이 사용하는 한국어는 이들에게는 영어와 같은 외국어인 셈이다. 농아인이 한글을 모르는 건 당연하다. 그러다보니 농아인은 책도 볼 수 없다. 글을 모르니 글에 담긴 문화도 알 수 없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관람했을 때였다. 일반 관객들은 ‘쟤 머리에 꽃 달았대’란 대사에서 빵 터졌다. 꽃을 달았다는 것이 미쳤다는 의미를 모르는 농아인들은 함께 웃지 못했다.

 

비장애인은 농아인이 게으르다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농아인의 비장애인인 자녀들도 한글을 모르는 부모를 무시한다. 그런 아이들에게 이 사모는 “너 영어 잘 알아? 네가 영어 모르는 것과 똑같아. 그렇지만 너희 부모는 수화를 제일 잘하잖아”라고 자긍심을 심어주려고 노력한다.

이 사모도 수화를 배우기 전에는 청각장애인에 대해 잘 몰랐다. 수화를 배우고 나자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농아인이 더 눈에 띄었다. 대학 4년 내내 주말이면 농아인 보육원인 인천성동원에서 봉사했다.

수화를 더 잘하기 위해 농아인교회로 옮기기도 했다. 이때 중고등부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던 김 목사를 만났다. 만난 순간부터 서로 반했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게 됐다.

“그냥 사귀어보다 아니면 헤어져야지. 그런 마음으로 만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4대째 기독가정이지만 부모의 허락은 쉽지 않았다. 부모는 결혼을 가족회의에 부쳤다. 첫 번째 회의 때는 두 오빠까지 반대해 부결됐다. 두 번째 가족회의 때는 “평생 존경할 사람이고 이런 사람 만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가 기도하셨다. 주께서 쓰겠다 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가족의 만장일치로 1990년 10월 결혼했다. 이들도 부부싸움을 한다. 그러나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하기 때문에 싸움이 오래가지 못한다.

이 사모는 쓰임 받는다는 게 감사해 농아인의 요청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방송에서 뉴스 통역을 하고, 자장면 배달 등 잔심부름을 해주기도 했다. 항상 농아인과 함께 있었다.

2015년 12월 드디어 국회에서 수화가 언어로 인정됐다. 그러나 농아인 학교에서조차 수화가 아닌 구화 교육을 하고 있다. 대부분 어릴 때 열병을 앓고 난 뒤 장애를 갖게 되는 농아인은 구화를 할 수 없다. 이 사모는 농아인의 언어인 수화로 유치원 교육부터 시작하는 대안학교를 세우는 게 꿈이다.

이 사모는 “수화는 손만 움직이는 언어가 아니고 얼굴 표정, 온몸으로 말하는 언어”라며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수화를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모든 한국인이 수화를 배워 청각장애란 영역이 사라지는 세상이 오길 꿈꿔본다.

"수화는 언어다"
한국수어, 손짓에서 오롯한 언어로
등록일 2016.12.10 14:24l최종 업데이트 2016.12.15 12:52l 송재인 기자(gooay@snu.ac.kr)
 “수화는 언어다!” 2013년 1월 15일, 서울시 종로구 안국역 앞 참여연대 느티나무 카페에서 농인들은 자신들이 늘상 쓰던 수화가 언어임을 새삼스레 선언했다. 수화가 농인들이 단순히 소통을 위해 쓰는 수단이 아니라 삶의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하나의 ‘언어’임을 공표한 것이다. 국내에서 수화가 법적으로 고유한 언어임이 인정되기까지는 12년이 걸렸다. 한국수어가 한국어와 더불어 대한민국의 공용어임을 규정하는 한국수화언어법은 지난해 12월 31일 국회에서 통과돼 2016년 2월 4일 법으로 공포됐고, 6개월의 유예기간을 거쳐 지난 8월 4일부터 시행됐다. 전문가들은 법의 시행에 따라 수어통역지원이 확대되고 수어교육도 광범위하게 시행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수어가 한국어에 예속되지 않는 고유한 언어라는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부족하다. 더불어 한국수어의 기반이 되는 농인의 정체성과 가치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농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 역시 불충분하다. 오랜 기간 사회적 몰이해 아래 가려졌지만 언제나 오롯이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언어, 한국수어에 대해 알아봤다. 





 농인(deaf person)이란?

  

  농인들은 ‘언어적 소수자이자 문화적 존재’라는 자기이해를 반영하여 스스로를 ‘농인’이라 표현한다. 기존에 청인(소리가 들리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농인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라는 의료적 진단에 따라 ‘청각장애인’이라고 불렸다. 기존에 ‘농(Deaf)’이라는 용어도 이러한 병리학적 관점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날 ‘농(deaf)’은 언어적·문화적 의미에서 재해석돼, 농인들이 수어라는 고유한 언어와 그 언어에 기반한 자신들의 문화를 향유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농’의 재해석이 곧 기존에 청각장애인으로 분류되던 이들을 모두 ‘농인’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청각장애인(a hearing-impaired person)’은 신체기능의 진단에 따라 사용되는 병리학적 용어이고, ‘농인(deaf person)’은 언어적 소수자를 의미하는 문화인류학적 용어이므로 두 단어는 포괄하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노인성 난청(아주 큰 소리로 말해야 알아듣고 일상생활에 현저한 장애가 있는 상태)를 겪는 이들이 수어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 농사회에의 지향, 소속감이 없다면 ‘농인’이라 지칭되기 어렵다.



*위 설명은 <영혼에 닿은 언어>의 내용 및 저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낯선 오해로 점철된 한국수어



  청인들에게 음성언어인 한국어가 있듯이, 세상을 눈으로 살아가는 농인들에게는 시각언어인 한국수어가 있다. 그러나 청인이 다수인 우리 사회에서 한국수어는 낯선 오해로 점철됐다. 이 오해들을 한 타래씩 풀어나갈 때, 우리는 한국수어를 보다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한국수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바로 한국수어가 한국어를 손으로 번역한 언어라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수화봉사동아리 ‘손말사랑’에서 2년째 활동하고 있는 천영서(철학 15)씨는 동아리에 들어오기 전에 수어란 한국어를 농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한 것에 가까울 것이라 예상했다. 같은 동아리에서 3년째 활동하고 있는 조정빈(언어 14)씨 또한 한국수어의 문법체계가 따로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두 언어의 문법체계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편견에 대해 《영혼에 닿은 언어》의 저자 김유미 한국농문화연구원 원장은 “시각언어인 수어는 음성언어의 하위언어가 아니”라고 말한다. 한국어와 한국수어는 다른 언어다.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공유하고 있지만 한국어와 일대일로 대응되지 않는 고유의 어휘를 갖고 있다. 또한 한국어의 조사, 어미변화로 치환될 수 없는 한국수어만의 독립된 문법체계가 존재한다.



  한국수어를 한국어의 하위언어로 보는 오해의 기저에는 수어를 하나의 ‘손짓’으로 보는 태도가 있다. 한국수어는 손 외에도 얼굴과 몸, 공간을 통해 문법을 표현한다. 이처럼 더 넓은 차원의 문법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한국수어가 한국어를 ‘손’을 이용해 속기하듯 옮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막이 제공되는 방송에서 수화통역 서비스를 병행해야 할 필요성에 의문을 품는 것 또한 이러한 오해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한국수어는 결코 한국어와 같은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평등한 언어권과 정보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한국어로 된 자막 외에도 한국수어로 된 수화통역을 제공해야 한다. 또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별개의 언어이지만 세계공용어는 아니다. 언어는 각각의 문화의 역사를 담은 상징 체계이므로 하나로 통일될 수 없다. 



  한국수어를 하나의 손짓으로 오해하는 경우 수어 사용자의 표정과 몸의 표지(標識)는 외면당하거나 보조적 수단으로 평가절하되곤 한다. 그러나 수어는 수지기호(손의 형태, 움직임, 위치 등으로 표현하는 의미 단위)뿐 아니라 비수지기호(손이 아닌 몸과 얼굴의 표지)와 공간으로도 구성된다. 많은 사람들은 수어를 수지기호만으로 이해하지만, 사실 비수지기호는 문장의 종류, 존대법, 형용사와 부사, 넓게는 화자 전환의 역할까지 하는 수어의 핵심 문법이다. ‘손말사랑’ 회원 천영서 씨는 비수지기호가 “보조적 역할을 하는 비언어적 표현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라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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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는 언어다"는 한국수어가 하나의 고유한 언어임을 보여주는 슬로건이다. ©오선영 사진기자





  김유미 원장은 수화노래를 통해 수어를 효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통념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수화노래는 수지한국어(한국어 문장에 한국수어 단어를 기계적으로 대응시킨 소통방식)와 얼굴을 통한 감정 표지로 이루어진다. 청인 입장에서는 수지한국어로 구성된 수화노래를 통해 수어 단어를 외우는 것이 효과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음악은 소리에 기반한 고유의 리듬과 박자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에 맞춰 수화를 하다 보면 수어 고유의 시각적 리듬이 파괴된다. 김 원장은 “(한국어 노래를) 작은 구 단위로 한국수어답게 바꿀 수는 있겠으나 이는 한국수어는 아니”라며, 수화노래만으로 수어를 배우는 경우 오히려 나쁜 언어습관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수어와 농사회, 위기를 맞다



  하나로 독립된 언어로 이해되지 못하는 한국수어는 오늘날 보존과 전승에 위기를 맞았다. 한국수어 사용이 자유로운 농학교의 학생 수가 한 학급에 30명 정도에서 5명으로 줄어든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유미 원장에 따르면 농학교는 “아이들이 수어를 배우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풍부한 언어 경험을 쌓는 곳”이다. 또 과거 농학교에는 초중고 학생들이 함께 사용하는 농학교 기숙사가 있어 자연스레 미성년 농 공동체가 마련되고, 학생들은 언어 경험을 하고 정보를 나누며 공동체를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농기숙사 운영은 물론 농학교조차 위축된 오늘날, 농학교를 중심으로 유지됐던 농사회 역시 위기를 맞았다.



  김유미 원장은 농학교가 위축된 이유로 ▲통합교육 기조가 주가 된 특수교육 ▲무한경쟁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 ▲부모들이 갖는 조바심과 교육열 등을 꼽았다. 통합교육이란 ‘장애이노가 비장애인이 한 교실에서 공부하며 같은 기회와 혜택을 누린다’는 이상에서 출발한 특수교육 기조다. 그러나 통합교육은 농문화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적고 수화통역 지원이 병행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탓에 언어·문화적 소수자인 농인들에게 오히려 독이 됐다.



  장애인 상담분야를 공부하고 있는 농인 이광순(한국복지대학교) 씨는 “중학교까지 일반학교를 다녔으나 의사소통이 어려워 공부를 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한다. 이광순 씨는 공부에 대한 뜻을 저버리지 않고 중년의 나이에 농학교에 입학해 수어로 교육을 받아 한국복지대학교에 진학했다. 이 씨는 “통합교육이라면 장애인인 나를 수용하고 비장애인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라 하지만 농인들에겐 힘든 과정”이라 털어놓았다. 김유미 원장은 “통합교육은 장애에 대한 병리학적 관점, 사회복지적 관점에서는 좋은 기조지만 문화적 관점에서는 소수자인 농인들이 자기정체성을 형성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며 “내 정체성을 갖고 그 문화 속에서 내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통합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부모들은 농아동들이 청인 주도의 사회에서 경쟁력을 잃을까 조바심이 들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이어져온 구화(상대의 말을 입술의 움직임과 표정으로 이해하거나 잔존청력을 통해 습득한 음성언어로 발화하는 것)주의 농교육은 농아동 부모들이 갖는 두려움을 반영한다. 구화 또한 농인들의 소통방식 중 하나지만, 구화주의 철학에 입각한 구화학교는 학생들을 지도할 때 한국수어를 최대한 배제한다. 따라서 구화 중심의 교육을 받은 농아동들은 한국수어에 대한 접근을 차단당하고 수어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 낼 기회를 갖지 못한다.



  한국복지대학교 사회복지과에 재학 중인 농인 주민지 씨는 구화 사용자에 대해 “‘들리지 않는데 왜 말(음성)을 사용하지?’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화를 사용했겠구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구화 사용자의 경우 학교를 졸업한 뒤 늦게나마 농사회로 발을 들이며 한국수어를 배우려고 해도, 한국수어를 온전히 익힐 수 있는 특화된 과정이 거의 없어 한국수어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한국어라는 음성언어가 권력을 독점한 우리 사회에서 소수언어인 한국수어는 여전히 그 입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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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아인협회는 '농아인의 날'인 지난 6월 3일 여의도에서 '수화언어법 제정'을 촉구하며 

가두행진을 벌였다. ⓒ비마이너





한국수화언어법, 농인들의 언어권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한국수어가 언어로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은 곧 한국수어를 사용하는 농인들의 언어권이 충족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특히 농인들은 방송 시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2015년 장애인방송 편성 실적 평가결과’에 따르면, 주요 방송사들은 장애인 자막, 화면해설, 수화 방송 등의 목표 편성비율을 충족했지만, 일부 자막은 미송출되거나 오탈자가 속출하는 등 그 질은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고르지 못하고 낮은 장애인방송 편성 비율도 문제다. 자막방송은 의무 편성비율이라도 높지만 수화해설 방송은 의무편성 비율 자체가 낮고(지상파는 전체 프로그램 중 화면해설방송 10%, 수화방송 5% 편성, 종편과 보도 채널은 화면해설방송 8%, 수화방송4% 편성), 이마저도 시청이 어려운 새벽 시간대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편성이 되더라도 문제는 여전하다. 주민지 씨는 “(농인) 가족들이 텔레비전 화면에서 수화통역사가 차지하는 화면비율이 너무 작아 시청을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현재 관공서나 병원, 은행 등에서는 수화통역 서비스가 거의 지원되지 않는다. 서울에 거주하는 농인의 경우 이런 장소에 방문할 때 각 자치구에 하나씩 마련된 수화통역센터에 소속된 수화통역사 혹은 농아인협회 소속의 수화통역사와 동행할 수 있긴 하지만, 턱없이 적은 수의 수화통역사들과 매번 일정을 조율하기란 쉽지 않다. 문화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주민지 씨는 “젊은 농인들은 영화, 박물관, 뮤지컬 등의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어도 자막서비스조차 잘 이뤄지지 않아 답답하다”며 서비스 개선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지난 8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한국수화언어법은 한국수어의 보급·발전과 농인의 교육·사회·문화 등 모든 생활 영역의 기반을 마련해 농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목적아래 제정됐다. 이에 따라 한국수화언어법에서는 농인들의 언어권을 위한 수어 서브시 지원 및 교육환경 구축을 규정하고, 한국수어의 발전을 위한 실태조사, 교원 양성 및 교재개발 등을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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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농아인협회 김정환 중랑구지부장이 한국수어로 "수화-언어-법"이라 하고 있다. 

ⓒ농아인협회 중랑구지부




  그러나 한국수화언어법에 대한 아쉬움과 염려도 존재한다. 서울시농아인협회 김정환 중랑구지부장은 “한국수어와 그에 기반한 농문화는 우리 사회의 소수·약자의 것이기 때문에 전문성을 살려야 한다”며 한국수화언어법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국어기본법의 시행령 및 규칙과 같은 것, 그러면서도 국어기본법에서와 같이 심의와 언어보급 기능을 담당할 상설 기구가 명시되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농인들의 피부에 와닿을 수 있는 현실적인 법 시행 여부도 관건이다. 김유미 원장은 법이 사업 위주로 진행되기보다는 기초연구를 지원하고 농인 전문 인력, 농인 지도자를 양성하는 등의 방향으로 활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농인들의 언어권은 곧 그들의 문화적 생존권이다. 한국수어가 쌓아 올리는 하나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의 주체에 대한 존중이 가장 우선시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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