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사람)벤자민프랭클린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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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좋은사람)벤자민프랭클린 자서전

by 정진한 2023.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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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와 성실함 지독하게 지킨 습관
성공한 ‘美 건국의 아버지’ 만들었다

잘 나가는 아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을 들려주기로 했다. 오늘의 명성과 부를 쌓아온 과정을 아들이 시시콜콜 알 리 없다. 젊은이들은 어제보다는 내일에 더 관심이 많은 법이지 않은가. 마침 짬이 났다. 시골에 1주일 머물면서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자서전을 써서 아들에게 읽히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오로지 아들만을 위해 썼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의 자만심을 만족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개정판을 펴내며 초판의 오류를 고치는 작가처럼 기회를 주면 바로잡고 싶은 삶의 대목이 왜 없겠느냐만, 이 정도면 모범적이고 자랑할 만하다고 여겼다.

독립전쟁이 벌어지면서 자서전 쓰기를 중단했다. 숱한 위기를 겪으며 드디어 승전했다. 그즈음 에이블 제임스가 편지를 보내왔다. 그가 쓴 자서전 자필 원고를 우연히 손에 넣었단다. 복사해서 보내니 뒷부분을 마저 써달라고 ‘압박’했다. 그러면서 “당신의 자서전이 세상에 나온다면-틀림없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젊은이들은 당신이 젊었을 때만큼이나 성실하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이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라고 치켜세웠다. 이 편지를 본 벤저민 보건이 맞장구쳤다. “선생님의 자서전으로 자서전들이 더 많이 나오게 되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서전에 실릴 만한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모두 합친 것만한 값어치가 있겠지요”라고. 두 사람은 그의 삶에서 근면, 검소, 절제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럴 때는 못이기는 척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프랭클린 자서전>은 이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나는 가난하고 이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자서전 두 번째 문단은 이렇게 시작된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온 아버지는 양초와 비누 제조업을 했다. 17남매를 키우는 집안이 넉넉할 리 없다. 라틴어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하다 쓰기와 셈하기를 학교에서 1년 더 배웠다. 그리고는 가업을 도왔다. 미국인들이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고, 100달러짜리 지폐에 초상이 실린 프랭클린의 학력은 여기서 끝난다. 바닷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마도 수평선을 바라보며 더 큰 꿈을 품었으리라. 하지만 아버지가 위험하다고 반대하며 인쇄소를 운영하는 친형 밑으로 보냈다. 책벌레였던 그에게 잘 맞는 직업이라 여긴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프랭클린을 키운 것은 8할이 책읽기였다. 적은 돈이라도 생기면 책을 사서 읽었다. 아버지 서재에 있는 책도 게걸스럽게 읽어치웠다. 열두살에 인쇄소 수습공이 되어서도 짬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점심을 채식으로 때우며 남는 돈으로 책을 샀다. 식사를 간단히 해치우고 책을 읽었다. “독서는 나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오락이었다.”

형과 불화를 일으켜 독립해 인쇄소를 차렸고, 성실과 진실함으로 승부를 걸어 마침내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여기까지가 1부의 내용이다. 스스로 말하듯 “남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여러 가지 자잘한” 이야기다. <프랭클린 자서전>의 빛나는 대목은 2부와 3부 앞부분에 있다. 누구나 꿈꾸는, 그의 인생역전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지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맨앞자리에 놓인 것은 검소함이었다. 가정을 꾸린 다음에도 꼭 필요한 하인만 두었다. 빵과 우유만으로 아침식사를 했고, 차는 마시지 않았다. 가구도 값싼 것만 쓰고, 먹을거리를 2페니짜리 토기에 담아 백랍수저로 떠먹었노라고 밝힌다. 두 번째는 근실함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한테 귀가 따갑게 들어온 솔로몬의 잠언이 있었노라고 말하는데,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언 22:29)가 그것이었다. 이 성경구절은 그의 영혼에 불도장을 찍었다. 열심히 일하면 부귀영화를 얻으리라는 신념을 품게 해서다. 신앙심이 부족해서였을까(그는 이신론자였다). 그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자신이 왕을 알현할 일은 없으리라 여겼는데, 나중에 따져보니 정말 다섯명의 왕을 만났고 그 가운데 덴마크 왕과는 저녁을 함께했노라고 너스레를 떤다.

<프랭클린 자서전>이 여전히 읽히는 데는 그의 덕목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사실만 아는 사람도 많은 듯싶다. 13가지에 이르는 덕목과 그에 걸맞은 규율을 정하고 이를 “자연스러운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표를 만들어 검토해 나갔다. 그가 1주일 단위로 실천하기로 한 덕목은 절제, 침묵, 질서, 결단, 검약, 근면, 진실함, 정의, 온건함, 청결함, 침착함, 순결, 겸손함이다. 더불어 시간을 정해놓고 일을 하기로 하고 이를 지키려고 계획표를 짰다. 이 가운데 그를 성공한 사람으로 이끈 열쇳말은 역시 ‘검약’과 ‘근면’이다. 이런 사실은 리처드 손더스라는 달력에서 다시 확인된다. 프랭클린은 1732년 교훈이 될 만한 글귀를 써넣은 달력을 펴내 큰 성공을 거둔다. 이 때 인용한 구절들은 주로 “나태는 모든 일을 어렵게 만들고 근면은 모든 일을 쉽게 만든다” “게으름은 발걸음이 느려 가난에 금세 따라잡힌다” “기름진 식탁은 보잘것없는 유언장을 남긴다” “여자와 술, 도박과 거짓은 재산을 탕진시키고 욕심만 늘게 한다” 류였다.

그는 자서전 3부를 쓰면서 앞머리에 전쟁통에 자서전 집필을 위해 모아두었던 자료를 상당수 잃어버렸다고 밝혀 놓았다. 그러다보니 프랭클린의 내밀한 세계를 더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만족시킬 만한 자서전을 써내지는 못했다. 성공한 사업가로 그친 것이 아니라 과학자이자 발명가로 성장하게 된 계기, 정치가로서도 성공하게 되는 과정이 소략하게 처리된 것이다. 특히 미국 독립전쟁기부터 미국 헌법의 기초를 닦는 과정까지 그가 보였던 활약상은 아예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책의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궁금해질 터인데, 그 답은 막스 베버가 해주고 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보면 <프랭클린 자서전>에 대한 분석이 나온다. 널리 알려졌듯, 이 책은 자본주의 생성의 비밀을 밝혔다. 더욱이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에 대항해 문화와 정신의 가치를 내세우는 책이기도 하다. 베버는 프랭클린을 통해 자본주의 정신이 무엇인지 추적한다.

 

베버가 자서전에서 주목한 것은, 이 책에 드러난 윤리의 최고선이 과거와 달리 “돈을 벌고 더욱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그것도 모든 적나라한 향락을 엄격히 피하면서 행복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모든 단점을 전적으로 벗어나 돈 버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실체를 추출해내는데, 그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예에서 분명히 했던 방식으로 직업으로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라는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이 결코 도덕적 비난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돈벌이가 물질적 욕구를 채우려는 수단이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었다는 것이고, 바로 그 점이 자본주의의 특징이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베버는 프랭클린을 통해 자본주의 정신의 “거의 고전적인 순수한 형태”를 엿본 셈이다.

베버의 분석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하나는 ‘마르크스 이겨내기’다. “사상이 경제적 조건의 반영이나 상부구조로 발생한다는 소박한 사적 유물론”에서 벗어나 문화와 정신의 가치를 돋을새김하고 있다. 프랭클린의 인쇄업은 수공업적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더욱이 그가 활동한 뉴잉글랜드 지역은 대자본가들이 세운 남부 식민지와 달리, 종교적인 동기로 세운 곳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프랭클린 자서전>에서 볼 수 있듯, 자본주의 정신은 피어났다. 이 점은 베버의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자본주의 정신이 자본주의보다 앞섰다고 보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하나는 검약과 성실이 자본주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하는 점을 해명한 것이다. 그것은 자본 증대와 관련이 있다. “금욕주의적 절약 강박을 통한 자본 형성은 쉽게 얻을 수 있다. 벌어들인 것의 낭비를 막는 것이 투자자본으로서의 생산적 사용을 야기시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베버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프랭클린은 ‘자본주의의 벨 에포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자본주의가 역사의 우세종으로 자리잡은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신분질서에서 벗어나 근면과 성실로 무장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물론 새 생명의 탄생에는 핏자국이 반드시 남게 되어 있다. 본원적 축적과정에서 희생된 약자들의 비명을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역사는 자본주의 체제가 더 낫다고 판단했고, 이에 다수의 사람이 동의했다. 자본주의는 봉건주의에 죽음을 선고하고 발전한 것만이 아니다. 가장 강력한 짝패였던 사회주의와 벌인 싸움에서도 승리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프랭클린 자서전>은 개인의 신화에 그치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역사에서 거둘 성공의 ‘예고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것일까. 프랭클린의 신화는 따라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노명우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이유를 묻다>에서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그는 오늘 우리 곁에 프랭클린이 다시 살아났다고 말한다. 뚱딴지같다고 통박부터 놓지는 말 것. 프랭클린 플래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성찰해보라는 것이니. 자본의 축적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이를 입증한다. 이런 시대에 일하는 사람들은 고용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자기계발에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되어 있다. 시간 관리의 중요성이 높아지자 프랭클린 플래너가 주목받았다. 노명우는 이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테일러리즘을 어떻게 스스로 적용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파악한다.

희망의 상징이었던 프랭클린이 불안의 그것으로 대체되었다. 검약과 근면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자본주의는 소비와 낭비 없이는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자본주의 정신이 있기에 자본주의가 가능했는데, (금융)자본가들이 자본주의의 토대를 치명적으로 허물고 있다. 어디에도 자본주의를 위협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의 말을 비틀면, 모든 견고한 것들은 사라진다 하더니, 내파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진정 누가 자본주의의 적인가? <프랭클린 자서전>은 오늘의 우리에게 절박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

가난한 탓에 정규교육은 2년 밖에 받지 못했다. 누구나 꿈꾸는 그의 인생역전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근원적인 힘은 철저한 근검절약의 실천이다. 13가지의 덕목과 규율을 정하고 ‘자연스러운 습관’으로 갖기 위해 덕목표를 만들어 스스로 게으름을 채찍질했다. 결국 밑바닥 인생에서 시작해 오직 노력만으로 자수성가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용 없는 성장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고용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자기 계발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그러나 프랭클린의 신화는 따라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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