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날마다 배우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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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좋은생각, 날마다 배우며 살게 하소서

by 정진한 2023.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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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배우며 살게 하소서

초라해 보잘것없어 보이고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면

머뭇거리거나 지나치지 않고
부끄럼 없이
날마다 배우며 살게 하소서

배움을 통해
확실히 깨닫게 하소서

나의 삶의 위치를 바로잡게 하시고
늘 새롭게 하소서

나의 삶이 늘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봄날에 돋아나는 새순처럼
푸르고 싱싱하게 잘 자라게 하시고

나의 삶이 늘 틀에 박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거듭하여
생명력 있는 믿음을 갖게 하소서

배움을 통하여 깨닫게 하사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들을

놓쳐 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것들을 배워 알게 하시고
아는 것들을
삶에 적용하게 하소서

나의 삶 속에서 날마다
배우며 살게 하소서

-용혜원-

백만송이 장미 원곡 Алла Пугачева - Миллион алых роз (Словакия, октябрь 1983 года)
https://youtu.be/ESe8Ya7LAOM

 

저자 김형석은 철학자, 수필가,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다.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태어나 일본 조치(上智)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30여 년간 후학을 길렀고, 미국 시카고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 철학계 1세대 교육자’로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 초대 회장을 지냈다.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현재 99세의 나이에도 활발한 저서 활동과 강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지난해에는 무려 165회의 강연을 했다. 이틀에 한 번 꼴이었다. 1960~70년대에는 사색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외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 했으며, 건강한 신앙과 삶의 길을 제시한 《예수》, 《어떻게 믿을 것인가》, 《백년을 살아보니》, 《인생의 길, 믿음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행복 예습》, 《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한가》 《그리스도인에게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백년의 독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 등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 교수로, 100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과 강연, 집필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20년 4월 23일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어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現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동)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4]

아버지가 운산금광에서 일하면서 미국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접해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다. 이어 이 지역 보통학교였던 신망학교에 진학했으나, 신망학교는 4학년까지밖에 없어 1931~33년에 창덕학교에서 나머지 과정을 마치고 평양의 미션스쿨인 숭실중학교에 진학했다. 이곳에서 만주(용정)에서 전학 온 윤동주와 함께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출옥 후 인근에 은거하던 도산 안창호에게 설교를 듣는 등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5]

이후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숭실중학교가 강제 폐교되고 '평양 제3공립중학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자퇴를 했고 이때 역시 자퇴한 윤동주는 만주로 돌아간다. 그러나 1년 뒤에 복학하여 5학년 과정을 마쳤다. 이후 소학교에서 1년간 교편을 잡았다가, 일본의 명문사립대 중 하나인 조치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여 1944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조치대학은 예수회가 세운 사립대학으로, 일본 내에서는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과 함께 '소케이조치(早慶上智)'로 불리는 3대 명문 사학의 위상을 갖고 있다. 역시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학교와 여러모로 비슷한 학교이다.

조치대학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고향에 있다가 해방을 맞았다. 이후 북한 지역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기 시작하자, 당시로서 매우 드문 대졸자로 참여를 권유받아 평안남도 대동군 인민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 무렵에 소학교(창덕학교) 선배인 김일성과도 만났다고 한다. 이 창덕학교는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6]에 있던 기독교계 학교였는데, 김일성의 외조부 강돈욱 목사가 학교 설립자 중 한 명이었고 교장을 지낸 바도 있다. 1912년생인 김일성은 외가와 인연이 깊은 이곳 칠골의 창덕학교를 1923~25년에 다녔다.[7] 이들은 연배 차이가 있어 학창 시절에는 만나지 못했다가, 김일성이 1945년 해방 후에 귀국하자 친분이 있던 목사들이 열어준 환영회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당시 동네 사람들은 동네 청년 '성주'가 김일성이 되어 지도자감이 되자 크게 놀랐다고 한다. 2021년 영국 BBC방송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을 하였다.

이후 점점 인민위원회가 다른 권력에 대한 숙청 지향적 행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위원직을 사직하고 고향 송산리에 중학교를 설립해 농촌 교육에 나섰다. 하지만 반공 성향의 개신교 지식인이었던 만큼 감시와 탄압이 계속되었고, 체포가 임박해오자 아내와 첫 아들을 데리고 1947년 8월 20일에 황해도를 통해 월남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1947년 10월부터 중앙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6.25 전쟁 정전 후에는 해외유학을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으나, 당시는 전후 혼란기로 해외유학을 가기가 쉽지 않던 상황이었기에 뜻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 1954년에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백낙준의 권유로 연세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이후 1985년에 정년퇴임할 때까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한다.[8]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103세를 넘긴 2023년 현재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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