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선교를 위한 기독교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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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선교를 위한 기독교적 이해

by 정진한 2006.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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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선교를 위한 기독교적 이해

 

목  차

 

I. 서론

 

II. 장애인에 대한 이해

 

  A. 장애인의 개념

  

  B. 장애인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이해

   

   1.장애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

      1) 구약에서의 장애인관

      2) 신약에서의 장애인관

    

   2.장애인에 대한 신학적 이해

      1)장애인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2)장애인의 존재의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C. 장애의 발생원인

     1. 일반적 관점

     2. 신학적 관점

     3. 예수님의 관점

 

III. 장애인 선교에 대한 이해

  A. 선교의 개념

  B. 장애인 선교의 명칭

  C. 장애인 선교의 성경적 배경

     1. 구약에 나타난 장애인 선교

     2. 신약에 나타난 장애인 선교

 

IV. 한국교회와 장애인 선교

  A. 한국교회의 장애인 선교역사

  B. 장애인교회와 지역사회의 관계

  C. 통합사역을 위한 구체적 프로그램

     1. 인식개선

     2. 장애인 욕구조사

     3. 편의시설 설치

     4. 장애아동의 교회교육

     5. 장애아동의 조기교실 운영

     6. 재가 장애인과의 자매결연과 가정방문

     7. 시설방문

     8. 함께 예배드리기

     9. 장애인주일 지키기

    10. 장애아부모 성경공부

    11. 시각.청각 장애인 부모의 자녀들을 위한 야학 프로그램

    12. 장애체험을 통한 장애인 이해

    13. 그룹 홈

    14. 전문사역자 양성

    15. 기타 프로그램-사경회,캠프

 

V. 결 론

 

 참고문헌

 

 

 

 

 

 

 

 

 

 

 

 

 

 

 

 

 

 

 

 

 

I. 서   론

 

장애인의 문제는 현대사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인류가 존재한 때부터 장애인은 인간 존엄성의 문제로서 상존해 왔으며, 인간의 무지와 편견은 언제나 장애인의 생존을 위협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향으로 점차 장애인도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했으며, 그 인격의 존엄성이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서구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킴과 동시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재활의 길을 걷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사회나 교회에 있어서 장애인 문제는 여전히 편견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래서 장애인은 아직 소외자의 위치에 머무르고 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요즘 들어 장애인을 비롯한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에서도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제도를 마련하고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과 정부의 정책들은 본질적인 장애인 문제에 대한 근본적 의식의 결여와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부족한 채 행정력만으로 무분별하게 전개되었고, 현재까지도 이러한 장애인 관련정책들은 과시적이며 전시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고 형식적인 수준에만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적 움직임과 장애인 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회는 아직도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 편견, 차별의식 등이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장애인들을 천대하거나 멸시하며 이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장애인들은 여전히 국가가 분명히 헌법으로 규정한 국민의 권리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진학이나 취업은 물론 생존권까지도 포기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장애인들의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는 높다란 공공건물과 사회의 시설들, 그로 인해 극단적으로 한정된 사회적 생활권의 강요, 의무교육에서도 제외되는 교육권의 박탈, 생계를 위한 기본적인 경제활동이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노동권의 제약 등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장애인들은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사회는 아직도 여전히 전통적인 낡은 부정적 장애인 관과 사회 의식으로서의 차별관념이 팽배해 있으며, 대부분의 사회 일반인들은 장애인들에게 무관심하며 심지어는 장애인의 추한 모습이 집 값을 떨어뜨리고 자녀교육에도 해롭다는 이유로 장애인들을 지역 사회로부터 몰아내는 파렴치한 이기심마저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다. 한국교회는 그 규모와 능력에 비해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실천에 매우 인색하다. 아직도 공공연히 교회는 복음전파에 집중해야지 가난한 이웃이나 장애인을 위한 사회사업을 하는 단체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생각이 아주 성경적 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물론 교회가 사회사업단체가 아니라는 생각은 옳다. 그러나 삶의 전반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복음은 설득력이 없으며, 그런 복음을 외치는 교회 역시 교회로서의 참다운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구분하여 왔고,‘영적인 것’의 추구에만 너무 몰두해 왔다. 이런 결과로 장애인과 같은 사람은 복음에서 마저 외면되고, 소외되어 왔던 것이다1).

사실 기독교인이 소외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삶의 모본이신 예수님이 그랬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일생 소외된 사람과 함께 했다. 그들 삶에 주목하고 관심을 가졌다. 그들에게 가까이 가셔서 그들을 치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삶을 동등하게 나누어 주셨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던 분이 예수님 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소외된 사람에게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기독교인의 직무유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 일찍이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런 의식이 결핍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이제 이러한 점들을 깊이 인식하면서 교회의 본연의 사명으로서의 장애인 사역과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오늘의 장애인 문제에 대한 확고한 입장과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 논문은 한국교회가 교회 본연의 사명으로서의 장애인사역과 장애인 문제에 대한 역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적절하고도 효과적인 대책들을 세우고 그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장애인에 대한 전반적이며 다각적인 이해를 통하여 교회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과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것이며, 나아가서 장애인과 더불어 함께 하는 교회로서의 통합사역을 이루기 위한 교회의 역할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장애인에 대한 이해

 

A. 장애인의 개념

 

우리는 흔히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적응해 나가는데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불편하거나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장애’또는 ‘장애인’이란 말은 자주 쓰이고 있으나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냐 하면  장애의 실체와 장애인의 기준, 정의를 분명히 내리기는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2). 다시 말하면 장애의 원인이나 유형 그리고 그 정도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정의와 개념은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에 따라서 달라진다. 시대나 지리적인 차이, 문화적인 차이, 사회적 환경에 따라서도 장애 또는 장애인에 대한 개념을 다르게 쓰고 있는 실정이다3).

우리 나라 장애인 복지 법4)에서는 장애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장애인이라 함은 지체장애,시각장애,청각장애,언어장애,정신지체등으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자를 말한다.”5)

국제노동기구(ILO)는 장애인을 “신체 또는 정신상의 결함결과로 적절한 직업을 유지해 나갈 전망이 없는 실질적으로 손상 받은 개인”으로 정의하고 있다6).

1975년 2월9일 UN 총회에서 ‘장애인 권리선언’이 채택되었는데, 제1조에서 장애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장애인이란 선천성이든, 후천성이든 관계없이 신체적 혹은 정신적 능력의 불완전으로 인하여 개인생활은 물론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확보할 수 없는 사람을 가르킨다.”7)

‘장애인권리선언’에서  볼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은 장애와 장애인의 범위를 넓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최근에 세계적으로 장애에 대한 이해와 생각이 크게 변했고, 깊어져 왔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장애를“개인의 특질인 신체적, 정신적 부전(不全)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기능적인 능력의 부전, 그리고 능력부전의 사회적 결과인 불리(不利;handicap)로 구분하고 있다8). 이것은 장애인 개인이 가진 장애요인(개인적 장애)에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장애요인(사회적 장애)까지 확대 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 중에도 장애의 경중에 상관없이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을 훌륭하게 감당해 내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자들도 많이 있다. 이런 사람은 신체장애 이외의 다른 장애로 인하여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태를 사회적 불리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불리란 신체장애뿐만 아니라 신체장애인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사회적 장애요인들의 집결 체라고 말할 수 있다9).                  

장애를 사회심리학적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는 메어슨(Meyerson) 은 “장애란 한 개인에게 객관적인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필요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즉 장애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가하게 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장애인으로 취급되고 안 되고는 그 사람 자신의 자격문제가 아니고 어떤 사회적 규범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맹인이 건널목을 지나가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그 사람이 맹인이라서 그런 것 보다 맹인용 신호기와 같은 그들에게 맞는 사회적 시설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으로 장애인들을 바라본다면 우리 사회에 진정한 장애인의 수는 훨씬 감소될 것이다10).      

 

B.장애인에 대한 성경적,신학적 이해

 

1.성경에 나타난 장애인 관

 

 1)구약성경에서의 장애인관

구약성경에서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크게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부정적인 장애인 관과 긍정적인 장애인 관이라 할 수 있는데, 부정적인 면으로서는 차별의 대상, 죄의 대가나 결과로서의 장애인, 무능력자로서의 장애인으로 나타나며, 긍정적인 면으로서는 보호의 대상, 소망의 대상,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서의 장애인등으로 나타난다11).

구체적인 성경의 예를 들면 첫째, 창세기 29장19절에서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큰딸 레아는 안력(眼力)이 부족하고, 작은 딸 라헬은 곱고 아리따와 야곱이 라헬을 연애하였다는 기록과, 레위기 21장16-23절에서는 장애인은 제사장 가문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규제내용이 나와 있는데 이것은 신체조건으로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인 면이 나타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제사장 자격에 대한 이 규례는 기독교에서 금세기 이전까지 장애인은 성직자가 될 수 없다는 사상적 기원이 되었으며, 이러한 차별의식은 금세기에 이르기까지 장애인 관에 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쳐왔다.

둘째, 죄의 대가로 장애인이 되는 경우를 살펴보면, 유다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에 패하여 포로로 잡혀가 두 눈이 뽑힌 사건(왕하25:7),여호와를 거스린 경우 삼손에게서 하나님이 떠나므로 두 눈이 뽑힌 사건(삿16:21),소돔성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천사를 모독했을 때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한 사건(창19:11)등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비유법을 써서 깨닫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소경 ,귀머거리, 절름발이 등과 같은 표현을 쓴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죄의 대가가 장애요인임을 시사하고 있다.

셋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는 무능력한 자로 취급하여 조롱과 모욕을 주는 경우는 사무엘 하 5장6-8절에 나오는 것으로 다윗 왕이 여부스 사람들을 치려할 때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다윗을 물리치리라고 조롱한 것에 대해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고 한 말이 속담이 되어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한 내용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여부스 사람들이 쫓겨가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의미이지만, 장애인이 조롱거리와 무능력자로 취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넷째, 구약성경에서 보는 긍정적인 장애인관 중 보호의 대상으로 본 경우는 율법으로 명시한 장애인의 보호에 관한 기록이 레위기와 신명기에 나타나 있다.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4)”.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 찌니라(신27:18)”한 이 두 기록은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의 보호에 관한 내용으로, 적극적인 표현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은 아니고 소극적인 표현으로 어떻게 하지 말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사람일수록 압력과 해악으로부터 더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뜻의 기록이 구약시대의 기록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실존했던 장애인들 중 보호를 받았던 인물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사무엘 하 4장 4절에 나오는 다윗 왕의 친구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라는 인물로 ,다윗 왕은 친구 요나단과의 우정과 사랑을 생각하여 지체장애를 입은 그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자중 하나처럼 왕의 식탁에서 먹게 하고 그의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등 왕손의 예우를 해 주었다.

다섯째, 출애굽기 4장 11절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라는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건강한 자가 되기도 하고 장애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건강한 인간을 만든 하나님이 또한 장애인을 만들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장애를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구약의 가장 핵심적인 장애인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장애인을 만든 하나님은 인간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라 창조주의 기쁘신 뜻에 의해 장애인을 존재케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여섯째, 소망의 대상으로 보는 장애인 관은 예언서에 잘 나타나 있는데, 예언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신약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고하면서 이날에 귀머거리가 듣고, 소경이 보며, 저는 자는 뛰게 될 것이라고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하고 있으며(사29:18,32:4,35:5-6,42:7),시편기자와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고독한 사람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렘31:8-9,습3:19,겔34:16,시146:8-9). 이것은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사람으로 장애인들이 받아 들여 지고 모든 소외된 사람들이 수용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성경의 장애인 관은 죄에 대한 형벌이나 저주라는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참 평화와 하나님나라에 수용될 것이라는 새로운 각도로서 긍정적인 면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2) 신약성경에 나타난 장애인관

 

신약시대의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장애를 죄의 대가로 보고 있었지만, 신약성서에 서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복음전파와 질병치유 사역을 통해 장애에 대한 이해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즉 장애인의 생명을 존중하고 장애를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이며, 장애인을 자선과 복음증거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 등이다12).

  장애인을 인간으로서 그리고 생명을 가진 존중의 대상으로 본 것으로 예수의 치유 사역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장애인이나 병자(病者)들이 치유를 받게 되는 과정을 보면, 백부장이 하인의 중풍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온 경우(마8:5-13)에서 주인이 하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모습이 있으며, 부모가 자녀를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데려온 경우(마17:14-18, 막9:17-29, 눅9:37-43에서 아버지가 간질병든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치유 받은 내용을 볼 수 있음), 친구나 이웃사람들이 장애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경우(마4:24: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자, 중풍병자들이 치유된 사건,  마9:32-34;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가 치유된 사건, 마12:22;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된 자가 치유된 사건, 마15:29-31;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러 사람들이 치유된 사건,막7:32-35;귀먹고 어눌한 자가 치유된 사건, 막8:22-26;소경이 치유된 사건, 마9:1-8과 막2:1-12,눅5:17-26;사람들이 침상을 메고 온 중풍병자가 치유 받은 사건)에서도 생명존중의 면을 볼 수 있다. 또 예수님이 유태인들의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장애인을 고친 사건들(마12:9-13,막3:1-5,눅6:6-10;회당에서 한편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신 사건,눅13:10-13;회당에서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여인을 고치신 사건,요5:2-10;베데스다 못에서 삼십 팔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요9:1-14;날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신 내용등)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식보다 생명을 더욱 귀히 여기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장애인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는데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중 이사야 61장1절 이하의 말씀,즉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구절을 읽으셨다는 기록(눅4:16-19절)을 보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장애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그 이유는, 그의 오신 목적이 인류의 전인적인 구원에 있었고, 장애인은 육체적인 구원과 영적인 구원을 모두 필요로 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13).

장애를 하나님의 섭리로 본 경우는 요한복음 9장1-13절에 나오는 시각장애인에 관한 기사에서이다. 제자들이 그의 장애가 누구의 죄에 대한 대가이냐고 예수님께서 질문한 것은 예수님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장애를 죄의 결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장애는 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장애인들도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독특성이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셨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7-28절의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약한 자들을 통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말씀과, 고린도후서 12장7-10절의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은 곧 교만하지 않게 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성도의 몸 속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을 통하여 장애를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였다14).

자선의 대상으로 본 장애인 이해는 누가복음 14장 12-14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21절의 말씀이 그 근거가 된다. 예수님은 장애인을 천국잔치에 초청되는 손님으로 비유하시며, 장애인을 천국잔치의 합당한 손님으로 언급하시는데, 이것은 권력자나 부자들, 귀한 사람들을 대접하는 것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들에게 베푸는 것은 이해타산과 무관하게 진정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복음증거의 대상으로 본 장애인 이해는 사도들이 장애인을 치유해준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사도행전 3장 1-10절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물질적인 동정보다 근본적인 치료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것이며, 인간들이 구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훌륭하게 하신 행동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이 외에도 사도들이 장애인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한 사건들은 장애인들에게 예수가 인생의 ‘구주’임을,  그리고 예수는 구원임을 전파하는 사역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과 병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 즉 그리스도의 천국사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신약성경에서의 장애인 관은 복음을 증거 할 대상이라는 긍정적인 참인간화의 회복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 장애인에 대한 신학적 이해 

 

앞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장애인 관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는 장애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신학적 주제 가운데 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 그리고 복음과 장애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장애인의 존재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살펴보고, 다음에 장애인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성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신학적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1). 장애인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장애인과 관련된 성경 전반의 내용들을 살펴볼 때 장애인은 단순히 죄의 결과의 형벌로서 나타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인격을 가지고 삶의 권리와 영적 권리를 가진 존재이며,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장애를 가졌다는 외형적인 이유로 장애인을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42:3)” 라고 하신 것처럼 상한 갈대와도 같은 장애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장애인에 대한 태도와 성경 전체의 정신이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함축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소외받는 자들 특히 장애인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 주셨으며, 그들을 복음에로 초대하고, 그들의 외모만을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보았고, 그들의 인격적 권리와 함께 구원받고 하나님나라의 일원으로 동참하는 영적인 권리를 인정해 주셨으며, 그들을 결코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으셨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병자와 장애인 치유사건에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사람들, 즉 사람들로부터 경멸 당하고 완전히 무시당해왔던 사람들 특히 장애인들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장애인들을 과거의 숙명적인 저주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의 육체와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으며,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살 가치와 목표를 부여해 주시고, 그들을 소외시키고 있던 사회에로 다시 인간으로서 복귀시키셨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 장애인들은 한 사람의 인격으로 완전히 긍정되었으며, 따라서 한 사람의 장애인으로서 그의 독특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었다.  장애인과 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미래와, 모든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의 표지였다15).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장애인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태도와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오늘날까지 장애인들은 언제나 인간 공동체 내에서 소외되는 위협을 받아 왔고 차별을 받아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 있어서 장애인들에 대한 용납은 진정한 공동체의 척도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용납이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나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용납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마땅히 장애인들을 하나님나라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한다.

   성경 속에서 장애인은 하나님나라 그리고 복음과의 관계에 있어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나타나며, 하나님나라 또는  복음의 우선적 대상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나라는 성경의 핵심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선포의 핵심내용이기도 하다. 그런데 장애인은 구약에서부터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이 그 나라의 도래의 표징으로 예언되고 있다( 사35:5,6,  사61:1,2). 그리고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예언(사61:1,2)을 자신의 메시야 직에 대한 취임선서(누가복음 4장 18,19절:“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채택하시며, 장애인을 복음과 하나님나라의 대상으로 밝히고 있으며, 또 그러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 실제로 나타내 보이셨다. 장애인은 예수 당시에도 오늘날과 같이 기피되었다. 인간은 새로운 이상적 공동체를 만들려고 할 때 그들의 취향과 이상에 맞는 자들로만 구성하려고 한다. 예수 당시에도 여러 종파들은 각기 자신들의 이상을 중심으로 동류의 인간들을 규합하는 한편, 여타의 인간들을 터부시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유유상종이라는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널리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배타성이 아니라 포괄성이 주도적인 원리이다16). 그 누구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없다. 적어도 인간의 차원에서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권리가 없으며, 만일 그러한 시도가 있다면 그것은 악마적인 것이다. 오히려 이제까지 그러한 초대에서 소외된 자까지 초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복음전파의 시작이다. 아무도 제외되지 않는 초대가 복음의 초대요, 그럴때에만 복음은 진정한 복음일 수 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은 장애인을 주목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우선적인 대상이다. 그 까닭은 그들이 장애인이라는 그 특성 때문이 아니라, 혹시 장애인이 제외된다면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초대는 진정한 초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17).

이러한 장애인들에 대한 하나님나라 또는 복음의 우선적 초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속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소외 된 자, 가난한 자, 병자, 장애인들에게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을 먼저 하나님나라로 초청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들은 하나님나라와 복음의 우선적인 대상이 되며, 이러한 점에서 장애인은 하나님나라 그리고 복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장애인은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와 관련되며, 복음의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장애와 장애인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고통과 고난의 문제이며, 따라서 이것은 십자가와 관계되는 문제이다. 루터에 의하면 참된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인데, 이 신학은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겸허의 절정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입장이다18).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의 경험에 의해 매개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쳤으며, 그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해 버림받음과 죽음을 받아 들이셨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의 신학적 성찰은 삶과 부활의 기쁨에서 시작하는 만큼 그것은 십자가와 죽음의 경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고난에서 새로운 의미를 주셨다. 인간의 고통은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고 단순히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며 회피해야할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나누시며 그 고통을  통해 구원을 제시하셨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십자가는 고통과 수난으로 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의미있는 고통과 수난으로의 초대이다19).

그런데 장애인에게는 인간의 고통이 집약적으로 나타나며, 장애인의 존재는 우리에게 고통의 문제를 직면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는 곧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요, 궁극적으로 십자가와 복음을 대하는 태도이다. 우리가 고통을 회피하려고 한다면 그래서 십자가 없이 영광에 이르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했던 사단의 시험에 빠지는 것이다. 더구나 십자가는 소극적인 안전의 삶이 아닌 적극적인 참여와 돌봄 및 사랑의 삶을 이야기한다20).

또한 십자가는 우리에게 약함 속의 능력이라는 새로운 힘을 제시한다.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1:18).십자가가 있는 한 더 이상 강함만이 강함이 아니요 약함만이 약함이 아니다. 세상의 중심은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해야만 하는 바로 그 자리이며, 그 부활하신 주님은 또한 다름 아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고통받은 사람들, 세상의 힘없는 모든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따라서 우리가 고통받는 장애인을 대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대하는 것이며, 또한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 장애인에 대한 돌봄을 요청한다.

그런데 장애인을 도우며 돌본다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희생이다. 희생은 합리주의의 영역이 아니고 사랑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장애인에 대한 거룩한 편애(우선적인 사랑)는 복음에서만이 가능하다. 기독교의 계시는 하나님 안에서 가난한 자, 소외받는 자, 장애인에 대한 거룩한 편애와 은혜는 하나로 결합된다21).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고통받는 장애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모습을 발견할 것을 요구하며, 장애인과 장애인의 문제를 통하여 십자가의 의미와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장애인은 십자가와 복음의 본질의 이해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또한 장애인은 복음의 실제성과도 관련된다. 복음은 근본적으로 구원의 소식이며, 구원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의 복원이다22). 따라서 구원은 죄와 곤경에 빠진 인간이 어떻게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를 보여준다. 복음은 전파될 뿐 아니라 누려져야 한다. 신앙 인은  자신이 믿는 복음의 내용을 그의 삶속에서 경험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비록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에 도래한다 하더라도 지금 이 시간도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우리의 기도여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믿지만 완전히 복음적이지는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며 복음의 생활화에 힘써야 한다. 그런데 이 복음의 생활화된 삶은 바로 사랑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이다. 따라서 장애인에 대한 사랑의 승리는 곧 복음의 능력의 과시요 입증이며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23). 이러한 점에서 장애인은 복음의 실제성과 관련이 된다.

이상에서와 같이 장애인은 본질적인 면에서 복음과 관련이 있으므로 장애인과의 관계를 무시하면 복음의 왜곡이 초래되고, 그 결과 교회는 참된 교회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게 된다. 즉 장애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장애인과의 관계가 단절된 교회는 진정한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다24). 만일 장애인이 교회생활의 전체적이고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 의미와 진정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장애인들은 교회가 단지 치유와 자선등의 활동에서 수고하도록 부름받은 대상이 아니라, 장애인은 교회 안에서 참으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는지를 입증하며 또 입증해야 할 역할을 담당한 자들로서 교회의 참된 생명에 전적으로 필수 불가결한 존재인 것이다25).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병들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되신다(고전1:27,28). 그리고 예수님의 장애인과의 관계에 대한 복음서의 묘사에서 보여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장애인과 하나되는 것으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이시다. 장애인의 존재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표지인 것이다26). 장애인은 하나님 나라와 복음 그리고 교회와 본질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는 중요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이며, 또한 우리가 도와야 하면서도 함께 해야 할 이웃이다.

 

  2). 장애인의 존재의의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장애인은 각각 개성을 지닌 인격체로서 교회 안에서 또는 사회 안에서 각 개인마다 고유한 존재의의를 가진다. 그런데 여기서는 장애인의 기능에 대하여 성경 속에 나타난 말씀들과 내용을 중심으로 몇 가지 특징적인 기능들, 특별히 장애인의 영적 존재의의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장애인의 존재의의 중에 첫째는, 복음증거의 기능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써의 의의를 갖는다. 복음서에 등장하고 있는 많은 장애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을 받음으로서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이었던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눅18:43), 십 팔년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등 굽었던 여인이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눅13:13),침상에 들려 왔던 중풍병자도 예수님께 고침을 받음으로써 많은 무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마9:8,막2:12,눅5:26)등 예수님을 만난 장애인들이 고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나라와 복음사역의 도구가 되었다. 또 성전 미문에 있던 지체장애인(앉은뱅이)도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받고 하나님께 찬양하며 영광을 돌린 것을 볼 수 있다(행3:8). 특별히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눈이 멀었던 시각장애인을 고쳐주셨을 때 그가 장애를 입게 된 것이 부모나 그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므로(요9:3) 그때까지 모든 장애를 죄와 관련시켰던 그 당시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시고 장애인의 영적 기능을 새롭게 일깨워 주셨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나 복음증거의 도구로 쓰임 받은 장애인들도 있지만, 장애를 그대로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으며 영광을 돌리며 살았던 사람들의 경우도 나온다. 예를 들어 구약에 나오는 이삭과 야곱은 노년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손을 축복하던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여로보암시대의 선지자 아히야(왕상14:4)도 시각장애를 가졌지만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으며, 또 육체의 가시로서 몸에 장애를 지녔던 사도 바울은 그 장애를 은혜로 받고, 장애를 가진 약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케 되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도록 하기 위해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한다고 고백하면서(고후12:9)하나님의 일을 훌륭히 감당하고 복음을 널리 증거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장애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거 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둘째로, 신앙의 한 전형으로 제시되는 하나님 나라와 신앙을 위한 적극적인 의미로서의 장애인의 존재의의가 있다.  마가복음9장43-47(또는 마태복음 5장29,30)에 보면 예수님은 장애인이 되라고 서슴치 않고 명령하고 계신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히 장애인을 수용하실 뿐 아니라 장애인을 신앙의 한 전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은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마19:12). 예수님은 천국을 위한 이러한 전제를 통해 장애인의 삶에 새로운 맥락을 제시하셨다. 즉 하나님나라와 신앙을 위한 적극적인 의미의 장애인의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참 정상인이 되기 위해 스스로 포기된 삶을 사는 것이 신앙의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27).

셋째로, 장애인은 비 장애인중에 영적 장애인을 대치하는 기능과, 비장애인들의 영적 결핍을 지적하는 기능과 역할을 가진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새로운 영적 시각에서 대조시키면서 장애인을 천국잔치에 초청되는 손님으로 비유하고 있다(눅14:12-14). 여기서 예수님은 유유상종 또는 주고받는 식의 잔치를 거부하면서 진정한 잔치를 베풀려면 장애인을 부르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잔치자리를 채우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비장애인들이 잔치의 초청에 응하지 않자 장애인을 부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불청객이 하나님의 귀빈이 되는 순간이다. 소위 정상인이라고 하는 비장애인들이 그들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지만 결과적으로 영적 장애인이 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장애인으로 그 영적 장애인들을 대치하시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장애인들이 위대한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신앙의 위인으로 활약했다. 장애자체가 그들에게 영적 탁월성을 준 것은 아니지만, 가난한 마음을 주어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고 그것에 민감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성경과 교회역사에 있어서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영적 결핍을 지적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이다28).

넷째로, 장애인은 약한 자로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또한 비장애인들에게도 도전과 위로와 용기를 주며, 각성하게 하는 기능과 역할을 한다. 고린도전서 1장27-29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장애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하고 약한자로서, 그들의 모습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와 신앙등을 통해, 또는 그들의 삶의 의지와 승리하는 모습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강하다고 하며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각성하게 하며 그들에게 회개와 도전을 촉구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또 장애인의 약한 모습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다른 비장애인들을 교만하지 않게 하고, 겸손의 길을 이끌며, 장애인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신앙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통해 비 장애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위로와 용기를 얻게 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

다섯째로, 장애인은 작은 자로서 심판대를 위한 주님의 대행 자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가진다. 마태복음 25장31-46절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심판 비유에서,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고 하시면서, 전자는 영생에 후자는 영 벌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작은 자란 세상에서 버림받고 소외 받고 힘이 없는 약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며, 장애인도 바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자 중 하나인 장애인을 사랑하고 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장애인을 배척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것은 곧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차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장애인은 작은 자로서 주님을 대행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섯째로, 장애인은 약한 지체로서 강한 지체와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그 몸을 굳게 세우는 기능을 한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전체의 몸 가운데서 약한 지체일지라도 한층 더 필요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도 육체의 가시로서 장애를 가졌던 사도 바울이 기록한 고린도 전서 12장12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 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고전12:12-24)”라고 말씀한 다음 22,23절에서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라고 극히 주목할 만한 말씀을 하고 있다. 그 이유를 바울은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고전12:25)”라고 말씀하고 있다. 전체 가운데 약한 부분이 섞여 있을 때 이것이 도리어 요긴한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이 약한 부분의 존재가 전체를 단단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바울에 의하면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기 때문(고전12;26)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27절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매듭 지으면서,그후에 이어지는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약한 지체로 비유되는 장애인은 강한 지체라고 할 수 있는 비 장애인과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며, 또한 약한 지체이지만 필요하고 요긴한 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를 사랑으로 굳게 세우도록 하는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애인은 우리의 공동체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며,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도구,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귀한 존재인 것이다.

 

C. 장애의 발생 원인

 

1. 일반적 관점

장애가 발생하는 원인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으나, 선천성 장애와 출생 시 사고에 의한 장애, 질병에 의한 장애, 사고에 의한 장애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학이 발달하고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장애발생원인도 점점 다양화되고 사회화되고 있다29). 그리고 오늘날은 유전적 원인으로 생기는 선천적 장애비율은 극히 낮고 대부분 환경 적인 후천성으로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먼저 선천성 장애발생원인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개체로 형성되기 이전에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 조건에 의하여 장애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가계(家系)의 순수한 유전은 아니지만 부모의 염색체 이상(배종손상)을 초래하는 돌연변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전 변화의 중요한 요소이며 환경적 요인인 방사선과 공해물질인 납 ,수은 중독, 그 밖의 화학적인 물질등이 유전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생명체가  생성하고 성장하는 모든 기간에 걸쳐 환경요인은 영향을 미치며 점차 환경공해나 약품 등 화학물의 사용이 늘어나고 있다. 방사선 등 핵 물질의 사용이 늘어나고 있어서 이러한 심각한 환경 적 요인이 개선되어 가지 않는 한 장애인의 발생은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임신기간은 장애유발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분만기와 출생 후 3-4년이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이 시기에 장애가 가장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30). 그런데 우리 나라는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되는 요인으로 교통사고로 인한 경우와 산업 재해로 인한 경우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 두 가지의 경우는 다른 나라에 비하여 현저하게 사고율이 높아 소위 교통사고의 대국 또는 산재왕국이라고 불러지고 있을 정도이다31). 1985년 인구보건연구원(현 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장애의 발생 원인 중 후천적 요인에 의한 장애가 전체의 80%이상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현대산업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산업재해,환겨오염,전염병,질병,교통사고 그리고 전쟁 등으로 인하여 이러한 장애는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으며, 한 개인의 책임보다는 사회전체의 책임과 문제로 인식되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32).

 

2.신학적 관점

우리는 지금까지 일반적인 관점, 다시 말해 사회학적 관점에서 장애발생원인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러나 어떤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 우선 주님께서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장애인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신학적 관점에서 장애발새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장애발생원인의 신학적인 접근을 인간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중에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인간창조에 대한 말씀은 창세기1장 26,27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장 끝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결함이 있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에 맞는 완전한 것 들 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이라든가 ‘불완전’이라는 말을 장애인 문제에 적용시켜 말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못하다. 천지창조에서 말하는 ‘완전’이라는 형태의 무흠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은 피조물의 목적성에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완전’이라고 하는 말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만들어져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게’보인 상태를 얘기한다.

창세기 1장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태초에는 모든 것이 매우 잘 지었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조화를 갖추고 부족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그때는 우리가 안고있는 장애인 문제는 없었다고 본다. 이사야서 35장에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시작될 때에 장애인은 없어진다고 말했다. 요한계시록 21장 에서도 저희가 장애나 질병으로부터 해방된다고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의 복음서에서는 그런 약속들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장애인들과 병자들이 고침을 받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태초에 천지만물을 지으실 때나 재림하신 후의 신천지에서는 질병이나 장애의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질병이나 장애는 그 두 세계의 사이, 즉 이 타락한 세상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33).

창세기2장의 인간창조기사를 보면, 하나님이 흙으로 창조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연약함을 가진 존재임을 암시한다. 인간은 흙으로 창조된 연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흙으로 창조된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심히 좋았던’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연약함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목적속에 있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서 그 죄가 인간세계에 들어온 후, 인간의 연약함이 장애의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창조당시 가지고 있었던 그 인간의 연약함이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육적인 변화와 환경의 변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모든 관계가 파괴되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교제가 단절되었고, 인간관계도 붕괴되었다.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어 버렸다. 해산의 고통과 노동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왔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의 모든 요소를 압박하게 되었다. 그리고 창조 때에 인간이 가졌던 그 연약함이 이러한 압박에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갖가지 질병과 장애와 괴로움을 낳게 된 것이다34).

 

3. 예수님의 관점

그러면 개인의 장애 발생이 문제된다. 개인에게 일어나는 장애 발생도 각 개인의 죄의 결과라고 보아야 옳은가? 물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소급해 보면 근본적으로 인간 창조와 인간의 타락에 닿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에 대해 깊이 있는 답을 주고 있다. 그래서 인간 타락 이후 각 개인에게 일어나는 장애 원인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올바른 장애인 관을 가지는 데에 바탕이 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어떤 관점으로 보셨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우리는 흔히 장애를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요한복음 9장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태도가 그랬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시 각 장애인35)이 된 사람을 보고는 이렇게 질문한다.“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그 부모이니이까”.제자들의 이 질문 속에는 당시 유대교의 질병에 대한 통속적 관념이 잘 표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나병36), 시각 장애, 청각 장애 등 불치의 병이나 장애가 죄의 징벌로 인한 것이거나(레16:15,16; 신28:61 ;대하 21:15;전5:17 등) 부모의 죄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다(민14:18; 시79:8; 사65:6,7). 예수님의 제자들도 장애인에 대한 이러한 통속적인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구약도 모든 질병을 죄의 원인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으며(욥2:1-10)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눅13:1-5). 또 범죄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에스겔 18:20도 제자들의 ‘부모 혹은 본인의 죄책’ 중 양자 택일을 강요하는 논리의 부당성을 드러내 준다 사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신자든 불신자든 햇빛과 비의 혜택을 똑같이 누리듯이 뜻밖의 질병이나 재난 역시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신자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신앙을 연단 시키시거나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질병을 주시기도 하신다(고후12:7; 벧전4:12,13). 따라서 제자들의 이러한 질문은 핵심을 찌르지 못한 우둔한 질문이었다.

제자들이 추측한 소경 된 자의 소경 된 두 가지 이유(그 사람 혹은 그 부모의 죄)를 모두 거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진정한 원인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 즉 하나님의 영광을 제시하신다(요11:4).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모든 질병의 원인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 지적하신 것처럼37) 죄의 결과인 질병도 있다38). 하지만 이 경우에는 예수께서 지적하신 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질병이다39).

마가복음 2장40)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중풍병자가 들것에 실려 지붕에서 내려진 것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는 장면이 나온다. 질병을 고치시기 이전에 이 같은 선언을 하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보고 장애 원인이 죄의 결과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중풍병자가 무슨 몹쓸 병을 지었기 때문에 중풍이 든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죄의 용서를 선언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주안점은 중풍병자와 그의 어떤 구체적인 죄 사이에 상관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다41). 비록,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죄와 질병의 유관성이 성경에 암시되어 있는 곳도 있기는 하지만 성경의 주된 관심은 죄와 질병의 상관성 여부보다는 주님의 주님 되심을 나타내는 데 있다고 보아야 옳다.  다시 말해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알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절).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들것에 실려 지붕에서 내려질 때, 그것을 통해 자신에게 죄 사함과 치유에 대한 권세가 있다는 진리를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두고 장애발생원인이 죄의 결과인 것처럼 속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께서도 장애와 죄의 상관관계를 아주 부인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9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귀한 수단이기도 하다는 적극적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부정적 시각을 일시에 무너뜨리고 있다42).“장애는 곧 죄의 결과”라는 논리는 예수님께 오면 완전히 없어져 버린다43).

 

 

III.장애인 선교에 대한 이해

 

A.선교의 개념.

 

선교 또는 선교 학의 개념은 정의를 내리는 사람의 신학적인 배경에 따라서 그 정의가 다르다.  선교란 말 자체가 오늘날 퍽 애매한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선교에 대한 이해도 각양각색으로 되었다44).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카이퍼(R. B. Kuiper) 박사는 전도와 선교는 결국 같은 뜻이라고 했다. 다만 전도는 같은 문화권과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언어와 문화가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선교라고 한다45). 이것은 전통적으로 교회가 이해한 선교 개념이다. 2차 대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교회는 해외 선교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지만, 전도에 강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선교 신학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46).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서구 교회는 분열로 말미암아 선교 지에 혼란을 주게 되었고, 이것은 선교에 큰 장대가 되었기 때문에 교회 연합 운동이 선교에서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서구 교회  지도자들은 전통적 선교 개념을 포기하고 사회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사상과는 반대로 복음주의 교회는 복음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도하는 것을 강조하여 거기에 대한 전략 개발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주의 내에서도 폭넓은 선교 개념을 말하는 자들이 있다. 선교를 타 문화권 전도로만 국한하지 않고 전도와 사회 봉사를 선교로 간주한다. 영국의 스톳트는 에큐메니칼 선교의 양극화를 절충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스톳트는 교회는 봉사의 단체일 뿐 만 아니라 예배의 단체이며 예배와 봉사가 서로 소속 적이긴 하지만 혼동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47) 하면서 에큐메니칼 선교를 부정한다. 동시에 그는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선교 관을 주장한다.

케인도 선교를 영혼 구원과  사회 봉사로 해석한다. 그는 “복음주의 선교를 전도와 동일시하여 영혼 구원은 잘 하지만, 다른 활동에 참여하는 데는 느리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사회봉사활동은 잘 하지만 영혼구원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 양자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경과 선교역사에서 살펴볼 때 선교는 전도뿐만 아니라 교회개척과 의료봉사, 교육 사업등 모든 봉사활동도 선교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전도는 “복음의 구속적 선포”라는 활동이며, 선교는 전도와 사회봉사가 다 포함되는 것이다48).

그러면 올바르고 균형 잡힌 선교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인적인 선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선교는 인간생활 전역의 복음 화이다. 비록 선교의 주목적이 복음을 전파함으로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한다는 것이긴 하지만, 교회는 선교사업의 대상자들이 영적 필요뿐만 아니고 육체적 필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영-육 통일체적 존재라는 것을 명심하여 “영혼구원”과 같은 표현들을 지양해야 하며 선교에 있어서 포괄적인 접근방법을 선택해야 한다49).

 

B.장애인 선교의 명칭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장애인선교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선교(mission)로 보느냐 목회나 사역(minister)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50).

전 호진은 “선교 학”에서 선교를 타 문화권에서 복음전도를 위한 교회의 복음전도를 위한 교회의 모든 활동, 즉 교육사업,의료사업,개발사업,구제사업등 모든 교회의 봉사활동을 선교로 간주하고 있다51). 물론 국내에서 행하는 전도 활동과 교회의 봉사 활동을 전혀 배제하지 않고 편의상 타 문화건권에서 행하는 전도와 봉사 활동에 국한하고자 한다고 했지만, 그가 근본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선교란 타 문화권 선교인 것이다. 또한 “토착화”(contextualization)를 저술한 헤셀그레이브(Daid J. hesslgrave)와 로맹(Edward Rommen)의 주장으로 보아도 선교는 타 문화권 선교임을 어림할 수 있다.“다양한 선교 관, 문화, 심리상태의 사람들과 관련되게 하나님의 메시지가 작용하도록 만드는 일에 봉사하는 일이 선교의 역할52)이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교를 타 문화권 선교로만 국한시키려는 경향은 선교를 해외선교(Foreign Mission)만으로 국한시키려는 경향이 움텄다.그래서  F.M-1,F.M-2,F.M-3의 개념이 일반화되기 시작하였다53).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장애인 선교는 특수한 선교(Special Mission)라기 보다는 특수한 목회나 사역(Special Minister)이라고 하여야 한다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처럼 장애인 선교는 타 문화권선교가 아니기에 특수사역(Special Minister)의 한 분야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장애인 선교는 나름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장애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이다. 예를 들면 농아 인은 일반언어와 완전히 다른  수화를 언어로 가지고 있고, 이 수화는 일반 언어체계와 완전히 다를 뿐만 아니라 수화를 사용하고 있는 농아인의 사고방식이나 삶의 유형이 일반인과 완전히 다른 차이점이 있다. 맹인도 점자라는 특수한 언어 표현방식을 지니고 있고, 촉각과 청각을 통해서만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하기에 독특한 사고방식과 삶의 유형을 지니고 있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정신 지체인들은 이러한 예에서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54). 따라서 장애인선교의 대상자 대부분이 특수한 상황에 처한 점을 감안할 때에 이들의 생존환경이 이질 문화권임을 충분히 단정할 수 있다55). 장애인 선교를 ‘Mission'으로 보는 것에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본다.

 

C. 장애인 선교의 성경적 배경

뉴비긴(Newbegin) 감독은 “선교의 신학은 성서 연구에 그 생명력이 있다56)”고 했다. 이것은 장애인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 선교를 말할 때, 장애인 선교의 성경 적 배경과 근거를 살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1. 구약에 나타난 장애인 선교

 

구약에는 ‘약자 보호법’이 있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인 장치를 말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인도주의에 근거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구약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 되었던 상태에서 구원의 하나님, 물의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징벌하시는 심판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사랑의 하나님. 그런데 구약 전체를 통해서 두르러지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을 보호해 주시는 ‘약자의 보호자’로서 하나님의 모습이다57). 신명기 10장 18절은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잘 밝혀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신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가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아들을 신원(伸寃)하시고(즉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시편에는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부르고 있다(시68:5). 이밖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힘없고 약한 자, 고난 당하는 자들의 외침을 들에 주신다는 것은 구약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58). 또 하나님은 고난 당하는 빈궁한 자들의 보호 성이 되신다는 말씀도 있다(이사야25:4).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시고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시며 이들을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어떤 윤리학자는 구약성경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은 “약자에 대한 끈질긴 편애를 가지고 계셨다”고 말하기도 한다59).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사회적으로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대상을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이 미워하고 학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행동인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대상도 사랑해야 한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도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신앙적인 논리이다60).

이런 배경에서 구약의 ‘약자보호법’이 마련이 되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현대에 적용하면 어떤 부류가 속하는 것일까? 이 상진은 성경에 나타난 “고아와 과부”의 의미를 신분과 형편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현대의 장애인과 노인에게 적용하고 있다61). 손봉호 역시 그의 책 [고통받는 인간]의 머리말에서 우리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을 장애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현대에서 약자에 속하는 부류는 이뿐 아니다. 현대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원화될수록 그것은 더욱 세분화될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이 현대의 약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된 기독교인은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약자들의  상황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외침에 우리들의 귀를 열고 우리들의 손을 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의 도리요 책임인 것이다62). 그러면 약자보호법의 내용을 정 형석의 글과 박 준서의 글을 참고로 하여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 구제를 위한 십일조

신명기 14:28-29과 26:12-15에 보면 모든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 가운데 3년마다 한번씩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특별한 십일조, 즉 구제 십일조를 드렸다. 하나님께 바쳐진 구제 십일조는 저축하여 두었다가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위하여 사용했다.

 

2)추수법

이스라엘에는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추수법이 있었다(레19:9-10,신23:22,24:19-21).곡물을 벨 때에는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않고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다. 또 포도 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배려였다. 룻기 2:23을 보면 과부 룻이 흉년 때에 이삭을 주어 媤母 나오미와 함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3)안식년과 희년

안식년은 6년 동안 땅을 경작하고 7년째에는 땅을 쉬게 하는 제도이다. 이때 저절로 생산되는 곡물과 포도 등의 소출은 땅 주인과 종들과 나그네와 심지어 들짐승들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이었다. 또 안식년이 되면 과거에 꾸어 준 모든 빚을 면제해 주고 히브리 종들도 자유를 얻었다. 희년(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후에 오는 해)이 되면 종이 해방되고, 판 땅도 원주인에게 돌아가는 등 모든 것이 원상 회복되는 해였다(출23:10-11,레25:1-7,25:18-22,25:23-33).

 

4)종교적 절기(신16장,예9:20-22)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기 위하여 지키는 유월절(무교절), 맥추감사절인 칠칠절(초실절),추수감사절인 장막절(초막절,수장절)등의 3대 절기는 빈부나 사회적인 지위에 관계없이 함께 즐거워하는 날이었다.

 

5)가난한 자의 제물과 예물

구약성경에는 성전예배와 제물에 대한 규정이 명문화되어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양에 미치지 못하면 집비둘기들이나, 산비둘기 새끼들로 드릴 수 있도록 배려했다(레5:7,5:11,12:8,14:21,27:8).

 

6)권력을 가진 자의 책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책임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힘있는 자는 스스로 자기를 보호할 수 있지만, 힘이 없는 자는 스스로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자들은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 재판에 있어서도 약한 자라고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출23:6,신24:17,27:19).

 

7)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여러 가지 법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여러 가지 법은 가난한 사람에게 구제하는 것과 꾸어주는 것과 품삯을 주는데 필요한 원칙이다. 이스라엘 사람 중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너그럽게 구제해야 하며 돈이나 물건을 꾸어주는 경우에 이자나 이식을 받는 것이 금지되었고, 담보물을 받는 경우에도 여러 가지 규정이 있었으며, 일꾼의 품삯은 반드시 해가 떨어지기 전에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출22:25-27,레19:13,25:35-38,신15:7-11,23:19-20,24:10-15).

 

2. 신약에 나타난 장애인 선교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이 땅 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예수님의 선교는 장애인 선교였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6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숱한 말씀 가운데에는 장애인의 이야기가 엄청나게 포함되어 있고,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난 사건의 대다수가 장애인과의 만남을 통하여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소외받은 사람들을 목자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다(막6:34).멸시받거나 소외된 무리를 예수님은 만나주셨고, 구원의 복음을 전했고 ,병든자를 고쳐주셨고, 멸시천대받은 자는 높여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누가복음 4:18-19과 마태복음 11:5같은 구절에서 요약적으로 볼 수 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자라난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셨던 적이 있다. 다음과 같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4-19). 그리고 세례요한이 헤롯에게 잡혀 갔을 때,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자, 메시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사야 35장을 인용하신다.“너희가 가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5:4-5,눅7:22).

물론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가난한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자든지 부자든지 차별이 없었다64). 그리고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주님의 주님되심을 알리는 은혜로운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가난하며 병든 자들을 민망히 여기시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외된 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곧 자가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다. 그것은 마태복음 25장의 ‘큰 심판 비유’에 잘 나타나고 있다.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은 구원받은 자의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실천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는 말씀으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약자에 대한 율법을 재조명한 것이다65). 예수의 삶속에서 소외받은 자들이 절대로 선교에서 외면받는 일이 없어야 함을 알게 된다.

이같이 예수님의 장애인 선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는 증거로 장애인 선교를 하셨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누가복음 4:16-18에 보면 장애인 선교가 메시야로서 해야 될 일임을 알 수 있다(눅7:22,마11:4-5).

둘째, 장애인을 깊이 사랑하심으로 장애인 선교를 하셨다. 마태복음 20:29-34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여리고에서 맹인 두 사람을 만나셔서 그들의 눈을 고치실 때, 민망히 여기사 고치셨으며, 마가복음 7:31-37에 보면 갈릴리 호수에서 귀먹고 어눌한 농아 인을 만나서 그를 고치실 때에도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고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고통 중에 있는 장애인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들의 장애를 안타깝게 여기신다는 의미이다.

셋째, 전인 구원적인 장애인선교를 하셨다. 마태복음 9:1-8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들것에 누워있는 중풍병자(지체장애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그의 장애를 고치셨다. 그리고, 요한복음 9:1-41에는 선천적인 시각장애인을 고치시고 자신을 증거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전도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치료하시는 전인 구원적인 사역을 하셨다.

넷째, 부정적인 장애인 관을 긍적적인 장애인 관으로 바꾸셨다. 우리는 그것을 요한복음 9:2-3에서 확연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8:1-4에서 예수님은 한 나병환자를 고치시는데, 당시 사람들은 나병은 죄의 결과로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죄로 인한 부정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병환자를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였으며, 만지지도 못하게끔 율법으로 정해 놓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만지시며 그의 병을 고쳐주신 것이다. 이것은 장애를 보는 눈이 일반인과 다르셨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섯째, 장애인 선교를 통하여 일반인 선교를 이루셨다. 마태복음 4:24-25에 보면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자 그의 소문이 퍼져 많은 무리가 좇았다고 했다.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장애인을 고치시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하셨지만,고침받은 장애인은 예수의 소문을 온 땅에 전파했다.

이와 같이 한 장애인이 예수를 만나 변화된다면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듣게 된다. 그래서 장애인 선교는 단순히 장애인들에게만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변화된 삶과 사랑의 장애인 선교현장, 장애인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토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도전을 주는 생산적인 선교이다66).

 

IV. 한국교회와 장애인 선교

 

A. 한국교회의 장애인 선교 역사

 

원래 우리 나라의 장애인선교는 19세기에 외국의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의료활동과 교육활동을 통하여 선교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와 장애인들은 불가분의 관계에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은 광혜원, 제일 정동병원 ,평양기홀 병원, 제중 병원 등 여러 병원을 설립하여 의료선교활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의료활동을 통하여 장애인 선교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장애인 선교를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한 것은 평양에서 부인병원과 한국 최초의 간호학교를 설립한 감리교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R.S.Hall) 여사가 1894년 처음으로 맹인소녀에게 점자법과 재활교육을 실시한 것이 근대 한국의 특수교육의 효시이자 장애인 선교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평양에서 1894년 맹인 의 점자법을 한글과 한자의 맞춤법에 맞춰 ‘뉴욕식 점자’로 초등 독본과 기도문 및 십계명 일부를 편찬하여 가르쳤다. 처절토록 비참했던 장애인들을 깨우치고 장애 요인을 극복하도록 모페트(S. A. Moffet) 부인과 한국 교회가 이사회로 결성되어 그들을 교화하는 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1897년에는 「불구아동을 위한 집」이 서울에 세워지기도 했다. 페리 양이 9명의 선교사들로 이사회를 구성하여 개설하기에 이르렀다. 1901년에는 23명의 장애아동이 수용돼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남아(男兒)가 19명이었다. 여기서는 한글과 학문, 창가, 산술, 지리, 재봉 등 기초 지식을 가르쳤다67). 이 후에도 선교사들에 의해 의료 활동과 교육 및 재활 활동 등을 통해 장애인 선교가 계속되었는데. 1897년 각국의 구라회 후원으로 부산 나병원 개설, 1903년 평양여자맹인학교,1904년 평야남자맹인학교(이 두 학교가 1914년 평양맹인학교로 병합), 1908년 포사이드 선교사에 의해 여수 애양원 교회 설립, 1909년 선교사들에 의해 평양농아학교 설립, 1913년 나환자를 위한 애락원 설립 등 많은 사업이 전개되었다68).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장애인 선교를 일반인 선교보다 소홀하게 다루지 아니 하였으며, 의료 교육 재활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장애인들에게 선교를 하였고, 정부의 장애인 복지 사업을 이끌어 주었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여명기로부터 장애인과의 뿌리 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교회의 장애인 선교의 좋은 전통은 엄밀히 말하면 외국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지 한국의 성도들에 의해 우리 교회가 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러한 프로그램들을 한국 교회 안에서 개설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조선시대를 마음껏 주무른 유교 정신의 마지막 노폐물인 신분 차별 의식은 장애인들을 멸시와 천대의 대상으로 보기에 충분한 시각을 제공하기에 남음이 있었고, 60년 이후 성장 일변도의 경제 정책은 능력 있는 사람만이 인정받는 사회로 만들어 놓았다. “잘 잘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가난을 극복하고 잘 사는 데 여념이 없었지 그 와중에 생기는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도리지 못하였다. 이런 의식은 교회에도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왔고, 교회 안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 교회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부흥하고 성장하는가에 있었다. 교인들의 장애인들에 대한 의식은 일반 사회인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단지 교회 입장에서 장애인들이란 동정을 받아야 할 불쌍한 처지에 있는 자들로 서 자선적 시혜적 차원에서 구제 대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교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의식은 일반 사회인과 거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속에서 장애인 선교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무관심은 70년대 말69)까지 계속되었다. 그나마 장애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이며, 1988년 장애인 올림픽을 계기로 일반 사회의 관심과 함께 교회의 장애인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는 듯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관심도 다시 수그러들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장애인 선교는 아직 시작 단계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선교 초기에는 교회가 장애인들의 문제에 대해 국가를 이끌어 갔지만, 지금은 오히려 국가의 복지 정책이나 재활 체계에서 교회가 훨씬 뒤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70). 여기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적어도 도의적인 책임을 가지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B.장애인 교회와 지역 교회의 관계

 한국 교회의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장애인들이 적응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장애인들은 일반 교회(비장애인들이 주로 모이는 교회)에 잘 적응하지 못할 때, 부득불 장애인 교회를 필요로 한다. 1992년 기준으로 볼 때 전국에 는 130개의 장애인 교회가 있다. 농아인 교회가 80개(농아 부 포함)가 있다. 정신 지체인 교회는 장애 특성상 독립된 교회는 없고 일반 교회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부서만 12개 있을 뿐이다. 장애인의 특성상 모든 장애인이 함께 모이는 교회는 없다71).

농아인 교회가 많은 것은 농아 인들이 일반 교회를 다니지 않고 농아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농아인의 특성상 언어가 다르므로 일반인 교회에 참석하기가 어렵고 통역 예배가 있다 하더라도 전달이 어려울 뿐 아니라 교인사이에 자연스러운 교제가 불가능하므로 농아 인들은 농아인 교회에 출석한다.

지체 장애인들은 장애 인구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지만, 생각보다 교회가 적은 것은 일반인과 적응하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이다. 35개 중 순수한 장애인 교회는 적고, 대부분 장애인 시설 교회 또는 장애인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교회이다. 사역자는 주로 지체 장애인이지만 다른 교회에 비하여 일반인 목회자도 많이 있다. 주로 군소 교단 소속 교회가 많은 편이다72).

장애인 교회는 장애인들이 교회에 접근하기가 쉽고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등 상호 친목이 좋아서 응집력이 있고, 장애 특성에 맞는 차체 프로그램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장점도 있으나, 다음과 같은 문제도 가지고 있다.

첫째, 일반 사회나 교회로부터 고립된 집단이 되어 언제나 소외된 상태에 있으므로 사회 통합을 저해가 된다.

둘째, 일반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으므로 교회 성장에 한계가 있고, 장애인들이 대부분 가난하므로 경제적인 자립이 어려워 계속해서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함으로 교회의 안정감이 없고 자립심이 약화되며 의타심이 생긴다.

셋째, 자원 봉사자의 도움이 필요할 때 손쉽게 도움을 받을 수 없다.

넷째, 자녀들의 교육에 바하지 못하다. 장애인 자녀들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장애인 교회에 나가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서 갈등이 발생할 수 있고, 출석할 경우에도 교사의 부족과 장애의 한계로 인하여 효과적인 교육이 어렵다73)

이런 점을 보아서도 장애인들만이 모이는 교회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것이 차선책은 될 수 있어도 최선책은 될 수 없다. 최선책은 아무래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구별 없이 함께 예배드리는 것일 게다. 최근 사회 복지의 방향은 분리해서 통으로 나아가고 있다. 분리는 자칫 고립을 만들 수도 있고, 장애로 발생하는 문제가 더욱 심화될 수도 있다. 함께 할 때, 서로의 형편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교회 안에서도 이 통합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의 장애인 교회는 장애인들만이 모이는 교회에 안주하지 말고 가능한 일반인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역 교회도 이런 점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회가 장애인에게 적응하지 않는다면 결코 장애인은 사회로 통합될 수 없다.”는 말처럼 교회가 장애인에 대해 적응하지 않는다면 결코 장애인은 교회로 통합될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넓은 공간 중에서 한 부분을 떼어 장애인에게 주는 것으로 자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 여건으로 완전 통합이 어렵다면 부분 통합이나 장애인 교회나 선교 단체와의 연합을 조심스럽게 모색해나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듯이 누구나 지닌 모습, ‘있는 그대로’ 그 모자람을 소로의 사랑으로 채워가며 어려움을 서로 합께 모여 조화롭고도 바르며 아름답고도 자연스럽게 주님께 예배드리는 교회, 바로 이런 교회가 장애인을 사랑하고 선교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교회의 모습이다74).    

 

C. 장애인 선교를 위한 구체적 프로그램

 

1. 인식 개선

 

몇 번이나 언급한 사실이자만, 장애인 선교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버리고 바른 인식을 가지는 일이다. 이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교회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인식 개선을 위한 적극인 홍보, 교육 활동을 하여야 한다. 교회가 외적으로 홍보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먼저 교횐 내부적으로 철저하게 교육되어야 한다. 장애인을 단지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분위기가 기독교 내에 널리 번져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먼저 ‘장애인’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 속에서 이들에 대한 그릇된 편견들을 깨뜨려야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주신 것은 곧 더불어 사랑하며 살라는 명령이다. 또한 현 장애인들 중 후천적 장애인이 80%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미래의 장애인 혹은 그의 가족이며 ‘장애인 문제’는 나의 문제임을 시사한다75). 이것을 위해서는 목회자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다. 아무리 현대 목회와 목회자 상이  급격하게 변모한다 해도, 교회에 미치는 목회자의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하다. 따라서 한 교회의 목자가 지니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그에 근거한 목회 방침은 장애인 문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목회자는 이 문제에 대해 선도적인 지식과 관심을 지님으로써 교회를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인 사명을 감당하도록 인도하여야 한다76).

 

2. 장애인 욕구 조사

지역에 살고 있는 장애인 실태 조사이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것이 선행될 때 교회가 어떻게 장애인을 도와야 할 지가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있으며, 또 그들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보면서 그들의 삶 속으로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자료를 만든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장애인의 욕구는 장애인이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간의 장애인 프로그램에 관하여 교회에서 언급된 것을 검토해 볼 때, 대부분의 계획이나 프로그램들이 실제로 장애인들의 욕구나, 급한 것들 또는 피할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장애인의 욕구를 신중히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장애인들을 도우면 그것이 장애인 선교요 복지라고 생각 한 것 같다. 그 욕구들에 대하여 조사해 보든지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장애인들의 욕구는 전혀 고려해 보지도 않고 ‘주는 쪽’나름대로 추상적으로 유추하여 결정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된 경우, 그것은 주는 쪽의 일방적인 자기 욕구만족에 지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장애인 선교와 복지를 제대로 실시하려면, 교회가 규정한 욕구에 따라 프로그램을 세울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규정한 욕구에 따라 세우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77).

 

3. 편의시설 설치

장애인들이 교회건물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교회건물을 개선하는 것도 장애인 선교에서 인식개선 못지 않게 중요한 일 중에 하나이다. 교회 안에 출입구,경사로,엘리베이터,장애인전용화장실과 전용주차장 등을 설치하여 건물에서 이동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새로 건축을 하는 교회는 반드시 편의시설을 마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편의시설에는 예산문제가 많이 거론되지만, 오히려 편의시설은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함께 이용할 수 있으므로 돈은 더 적게 든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대시설들은 사실 노인과 어린이에게도 몹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미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이라면 교회 안의 모든 공간을 장애인이 불편함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재정이 어렵거나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 교회소유의 건물이 아닐 경우에도 최대한 편의시설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일 뿐 만 아니라 평일에도 장애인들이 유용하게 이 공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78).

 

4. 장애아동의 교회교육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통합(Integration)은 중요하다. 교육에 있어 그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교회 안에 장애아동 부서나 학급을 만드는 것이 또 하나의 차별이라고 본다. 그러나 정신지체 아동이나 청각장애아동을 위한 부서를 별도로 운영하는 것은 장애에 따른 요구들에 적합한 기독교 교육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능적인 구별이다. 학습장애아동이나 정서장애아동(자폐증을 제외한),언어장애아동,시각장애아동,지체장애아동의 경우는 이들의 교회교육과 관련된 학문적 뒷받침을 받아 비 장애아동들과 함께 교육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의사소통이나 전달방법에 있어서 전문화가 요구되는 정신지체아동,자폐아동,청각장애아동들은 별도의 부서가 존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하겠다79).

장애 아동들에 대한 교회 교육은 그 가족들을 복음에로 이끄는 확실한 통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주중 교육뿐 아니라 주일 예배만 열어도 동일하게 얻는 ‘장애인세계’에 대한 대표적인 선교 효과가 된다. 교회는 교회대로 순수한 신자들을 얻을 수 있고, 교인들은 교사나 자원봉사자로 장애인 교육과 선교에 직접 참여하며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할 수 있어서 좋다.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일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 장애아동을 둔 부모들이 떳떳하게 아이를 교육시키고 나아가 비장애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도록 이끌어내는 데에도 이들 대상의 교육과 예배는 규모의 대소를 막론하고 각 교회마다 필수적으로 개설되어야 한다고 본다80).

 

5. 장애 아동 조기 교실 운영

 

발달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학습 능력 발달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시기는 출생에서 첫 4년간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성인 능력의 학습 능력의 약 50%가 이 시기에 형성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아동에게 교육적 자극이 풍부한 환경을 마련해 주면 아동의 능력이 효과적으로 개발될 수 있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더구나 장애인은 장애 발생 당시부터 교육과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늦게 시작하는 것보다 장애 경감이나 치료적인 면이나 경제적인 면서 볼 때 더 효율 적이리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장애아동 조기교육 기회의 확대와 어릴 때부터 통합 교육을 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81). 장애 아동들의 경우 장기적인 교육이 없으면 정상적인 기능마저도 퇴행되고 부정적인 문제행동으로 발달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영유아기의 때의 교육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통합교육은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지만, 교육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통합교육을 받은 장애아동은 그만큼 사회통합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장애인 가정 중에는 생활이 어려워 부득불 맞벌이를 해야 하거나 엄마 혼자서 생계를 꾸려가며 아이를 키워 가는 가정이 많다. 그런 아이들은 어디에 맡길 곳도 없어 방에 묶어 두고 일을 나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가정의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교육과 탁아소가 절실히 필요한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마련해 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교회가 이를 담당하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장애아동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바르게 자랄 수 있는 길은 교회의 끊임없는 이해와 관심을 바탕에 둔 교육과 지치지 않는 사랑을 베풀 때 더욱 뚜렷해지리라 생각한다.

 

6. 재가(在家) 장애인과의 자매 결연과 가정방문

 

우리 주변에 많은 장애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그들 잘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회적 편견과,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편의시설 때문에 집밖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 일반적으로 장애인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으므로 교회가 재정적인 원조를 해야한다82). 특히 생활 보호 대상자에 속하지 않는 경계선급 이상의 장애인에게 있어 물질적인 도움은 절실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구제활동들이 생활 보호 대상자들에게만 주어지기 떄문이다. 따라서 교회 내의 구역 조직을 활용하여 1구역 1가정 돌보기, 구역 헌금으로 장애인 가정 돕기 등의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다양한 가정을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다83).

그리고 장애가 심하여 일상생활이 어려운 가정을 방문하여 청소, 심부름, 외출, 간단한 학습지도, 말 벗 등으로 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 사실 장애 아동을 양육하고 있는 부모들은 장애자녀로 인하여 외부 활동에 상당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84). 특히 중증장애아동을 가진 부모일수록 더욱 힘들다. 이런 가정에 주중에 정기적으로 방문해 대신 돌보아 주는 것도 큰도움 이다.

 

7. 시설 방문

 

재가 장애인을 방문하여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설 장애인들을 찾아가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현재는 대부분 일회적인 방문이거나 지속적이라 하더라도 거의 시혜적인 차원이다. 이제는 이러한 형식적인 방법을 배제 받고 평생을 두고 관계를 다져나가야 하고 최소한 직접 몸을 부대끼는 만남이 되어야 한다. 전술한 계획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문 인력뿐만 아니라 자원하여 섬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재가장애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시설장애인과도 자매결연을 맺는 것이 좋다. 이것을 통해 형제애를 구체적으로 나누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설생활에서 올 수 있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해소시키며 건전한 정서발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

 

8. 함께 예배드리기

 

청각 장애인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관심만 있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수화 예배, 특히 수화 설교가 가능하다면 정말 좋다. 만약 수화로 하기가 당장 힘들다면 그 날의 설교 내용을 미리 준비하여 주보에 싣든가 아니면 따로 준비해 두어야 한다.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서는 점자 주보, 성경책, 찬송가, 기타 성경 교재들이 교회에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 저마 번역을 하는 봉사 단체들이 꽤 있으므로 교회 내에서 역량이 안 되더라도 이들의 도움을 얻으면 쉽게 준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로하신 어른이나 환자들을 위하여 성경, 찬송 테이프를 준비하는 것처럼 이들을 위한 점자 자료들의 준비는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예배 실 구조도 이들을 고려한 모양이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빽빽하게 간 의자들로 가득 찬 예배 실에서 뇌성마비 장애인들은 불편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은 지금의 구조에서는 맨 뒤에서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다. 우리 지역에 이런 장애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교회는 그를 생각해야 한다. 그 해당 지역에 사는 장애인들의 구성과 특성에 맞게 예배 실 구조를 바꾸어 보자. 의자의 앞 뒤 간격-편한 의자 구비, 의자의 옆 간격-휠체어 한 대 정도는 거뜬히 지나갈 수 있게 한다. 이 간단한 변화는 노인들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아울러 교회가 휠체어 몇 대를 구비하여 교회 내에서 장애인과 노인들이 이용하게 하면 한결 좋을 것이다.

특히 중증 장애인이 함께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중증 장애인에게 있어 작은 욕구의 충족도 커다란 기쁨이 된다. 단 이들은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에도 이러한 억압된 감정을 해소 할 기회가 적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예배는 더욱 중요하다85).

교역자는 그 지역 실태 조사에서 만났던 장애인들의 가정을 우선적으로 심방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지만 교회의 턱이 높아 좌절하는 장애인이 그 지역에 적어도 한 사람은 꼭 있다. 이것은 ‘함께 예배드리기’ 위한 교역자의 의무이다86).

 

9. 장애인 주일 지키기

 

매년 4월 셋째 주일을 장애인 주일로87) 지키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는데, 이 주간에 장애인을 생각하는 기간으로 정하여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해 본다. 교회 경사로 설치, 성경, 찬송 등을 점자로 번역하기, 장애인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교회 내부적으로 재교육하고 또 지역 사회에 홍보하여 무료 강좌 실시, 교회와 지역에 거주하는 장애인 중 필요한 사람에게 전동 휠체어 등 각종 보조기기들 선물하기 - 이런 것들은 관심만 있다면 실천이 가능한 것들이다. 이런 준비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고 있다면 장애인들을 찾아가 우리 교회로 초대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일회적인 초대에 그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난 어느 주일 아침에 장애아를 둔 부모가 그 어린이 함께 우리 교회에 예배를 드리고 온다면 그것이 우리의 큰 시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88).

 

10. 장애아 부모 성경 공부

 

장애아 부모들은 대부분 장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선천적 장애일 경우가 더욱 그렇다. 한 가정에 장애아가 나면, 부모뿐 아니라 온 가족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게 된다. 이 충격을 안겨주게 된다. 이 충격은 선천적 장애가 원인 불명일 경우 더욱 복잡한 심리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부모는 “왜?”라는 해결할 수 없는 의문 속에서 고민하게 된다. 양육 과정에서도 부모가 짊어져야 하는 부담은 실로 크다89). 때론 극도의 심리적 불안과 수치심으로 자신이 낳은 자식을 부정하기도 한다. 지금 기르고 있는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도무지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병원의 실수가 아니면 누가 고의로 아기를 바꾸었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학대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사회에는 장애에 대한 몰이해와 부지로 장애아를 낳은 산모를 바르게 바라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집안에서뿐만 아니고 지역 사회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수치심을 느끼게 되기도 하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내 쫒거나 모자 동반 자살이라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장애에 관한 미신이 만연해 있는 것도 문제이다. 서구에서는 그것이 성스러운 계시나 혹은 나쁜 징조라는 식으로 만연되어 왔다. 또한 임산부의 이상한 체험이라든가 짐승이나 짐승과의 관계, 혹은 운명이나 선조들의 앙화(殃禍), 윤회설 등과 같은 것에 관련이 있다는 미신이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유전’이라는 과학적인 미신이 생겼다. 사실 장애 발생 원인 중에는 유전에 의한 것도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유전자의 문제라 할 수 있는데 결국은 인간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은 환경 파괴가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장애에 관한 잘못된 인식은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것이겠지만, 동시에 잘못된 인간관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90).

이런 경우에 처해 있는 장애아 부모들의 의식을 교정하고 위로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성경 공부를 통해 그것이 가능하리라 본다.

 

11. 시각.청각 장애인 부모의 자녀들을 위한 야학 프로그램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 자신의 어려움은 이겨나갈 수 있지만 자녀들에게까지 안겨 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적인 자기 희생을 통해서라도 자녀의 잘됨을 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자녀들이 오히려 부모를 도와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동시에 양육을 받아야 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없기도 하다. 그 이유는 부모 자신이 장애인이며, 장애인 부부의 가정 대부분이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청년들을 중심으로 장애인 가정의 자녀들의 학습지도를 무료로 도와 줄 수 있다면 이 또한 장애인 부모들에게 한시름을 덜게 하는 좋은 일 일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하여 장애인 부모로 인한 고민과 걱정거리를 함께 상담하여 주고, 동시에 신앙적으로 극복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 또한 장애인 선교의 한 영역을 감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정규 과정의 교육을 받지 못한 중증 장애인들의 학업을 지속적으로 도와서 그들의 학구열을 승화시켜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프로그램이다. 많은 장애인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많은 사람과의 대화를 즐거워하게 되면, 다음문제는 공부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은 무엇이 되기 위하여 공부하십니까?”하는 질문보다 “무슨 공부를 하고 싶습니까?”하는 질문을 장애인은 받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만학도일 수 있다. 혹 중간에 중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시작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 법칙은 장애인에게 적용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먼저 시작하라.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자!” 이것은 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대답이다91).

 

12. 장애체험을 통한 장애인 이해

 

장애인 선교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자기 손에 바늘이 찔리지 않는 한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로 합리화하곤 한다. 그렇다고 장애인이 되라고 기도할 수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장애인의 어려움을 한번 정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장애인을 도우려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1) 1시간이상 말하지 않고 대화하며,1시간 뒤에 나누었던 대화내용을 확인하기

(2) 볼륨을 끄고 TV나 좋은 영화 Video시청하기 그리고 내용 줄거리 나누어 보       기

(3) 다리를 각목으로 묶어 100m달리기

(4) 눈을 가리고 행보하기, 케인(흰지팡이)을 짚고 정해진 길 찾아오기

(5) 휠체어를 타고 시장보기, 달리기, 지하철 타고 일정한 지점에서 만나기

(6) 장애인과 함께 걷기

(7) 장애인 돕기 1일 바자회

(8) 장애인 무료진료하기

(9) 장애인과 함께 연극, 찬양의 잔치 공연, 장애인과 함께 가두 캠페인,장애인과         함께 노방. 축호 전도하기

(10) 장애인 초청 간증듣기92)

 

13. 그룹 홈 (Group Home)

  

그룹 홈은 장애인들의 탈 시설화를 통한 사회복귀 추세에 따라 미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198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우리 나라도 1992년도 장애인 복지 사업의 하나로 소집단 가정제를 도입하여 93년부터 이를 대폭 확대시키기로 함으로써 장애인을 집단 격리 수용하는 복지정책에서 탈피하여 집단가정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그룹 홈이란 지역 사회 내에 있는 보통 주택(아파트,맨션,독립주택등)에서 소수의 장애인들이 공동으로 생활하고 그들의 능숙하지 못한 일들을 전문 직원에 의해서 원조를 받는 생활형태이다. 집단 가정의 근본적인 목적은 가족적인 환경 속에서 독립적인 생활기술을 가르치는 것이며 장애정도 및 특성에 따라 더욱 독립적인 생활의 장으로 옮길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그것에 대비하기 위한 과도기적 훈련장이라고 할 수 있다93).

그룹 홈은 장애인의 자율성을 향상시키며 장애인과의 연결을 통해 장애인과 부모에 대한 정서적 지지를 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 전문가와 보호자들이 그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서비스이다. 그룹 홈 거주자들은 대규모 시설 거주자들 보다 지역 사회에 더 잘 적응하며, 직업 기술과 행동에 변화를 보였다. 또한 지역 주민들의 태도에서도 거부감이나 편견보다는 그룹 홈을 도울 수 있는 보고가 있다94).

한국 교회는 이 그룹 홈을 운영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그룹 홈의 필요성을 인식한다면 좋은 성과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14.전문 사역자 양성

 

한국교회가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들을 통해 나타난다. 많은 교회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마련하고 교회 안에 장애부서를 두기도 한다. 그리고 각 교단마다 총회 안에 장애부서를 두는 움직임도 서서히 일고 있다. 그리고 여러 선교회를 통해 섬김의 열매도 많이 맺어 가고 있다. 또한 장애인 사역에 헌신하려고 하는 젊은이들도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 장애인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늘 문제가 되는 것은 훈련과정과 헌신에 있어서 척박한 사역비(使役費) 문제이다. 그래서 장애인 선교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역비 후원에 대한 기도가 중대한 문제가 된다. 하지만 많은 후원자들은 장애인에게 직접적으로 제공되는 물질적 서비스만 고려하고 있을 뿐,그 서비스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전문가, 이를 위하여 프로그램을 개발, 연구하는 사람들, 장애인 선교를 홍보하고 사람들을 계몽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의 가족들에 대한 배려가 적은 실정이다. 장애인 사역에 헌신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며, 때로는 대학원과 유학과정을 거쳐서 더욱 전문적인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위한 더욱 심층적인 투자가 희박하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많은 제자들을 통하여 일을 하신 것처럼 사람에 대한 투자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이 부분의 투자가 적으면 결국 장애인에게 전달되는 복음과 복지서비스는 후진성을 면치 못할 것이며, 결국 장애인 선교단체는 급증하나 효과적이고 전문적인 장애인 선교를 실천하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은 재정적 투자뿐 아니라 외적인 투자, 특히 전문적인 사역자에 대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눈앞에 전달되는 서비스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장애인들의 총체적인 재활을 위하여 투자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전문적이 되지 않고 오히려 매일 어둡고 낙후되고 있는 장애인 사역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장애인 사역을 포기하도록 하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어려운 장애인 선교단체라는 낙인보다는 늘 새롭게 발전하고 더욱 전문성이 두드러지는 장애인 선교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는 전문 사역자 양성과 이들의 사역자체에 대한 기도와 투자가 있어야 한다95).

 

15. 기타 프로그램- 사경회,캠프

이밖에 교회가 장애인 선교를 위해서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장애인들의 영적 도전을 위해 사경회를 여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 캠프를 열 수도 있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만나보지 않고는 어렵다. 사경회나 캠프는 이런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러기에 사경회나 캠프, 특히 장애인 캠프는 장애인 선교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프로그램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V. 결 론

 

우리는 지금까지 장애인 선교와 관련된 여러 문제를 분석하며 장애인 선교회를 위해 교회는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 지에 대해 살폈다.

다원화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장애인 선교가 강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미 우리가 살폈듯이 현대사회에서 장애문제는 한 개인의 문제로 돌릴 것이 못된다. 그것은 사회전체의 문제요 사회전체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사회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문제이다. 오늘날을 사는 현대인들은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런 사실은 염두에 두고 “예비 장애인”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지금 장애를 입지 않은 사람은 다행히 장애를 입지 않고 살고 있을 뿐 언제라도 장애를 입을 수 있는 잠재적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장애인에 대한 관심은 바로 자신에 대한 관심일 수 있다는 논리가 선다. 이제 우리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때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나라에서는 장애를 입은 사람들을 “불행한 사람”으로만 단정짓고 외면하여 왔다. 관심의 표현도 “불쌍한 사람”을 위한 자선적. 구빈적 차원에 머물러 왔다. 주는 사람의 입장만 선행으로 나타나며 받는 사람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96).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시피 초대 한국 교회는 장애인에 대한 교육과 의료를 통한 선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60-70년대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능력 있는 사람만이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고, 세상의 차별의식, 배금주의 등이 알게 모르게 교회 안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서 장애인을 바라보는 눈이 세상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목회자들은 교회의 성장에만 관심을 가졌고, 그런 과정에서 소외된 자들을  돌아볼 여유조차 가지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자유주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오게 되었다. 이것은 복음주의적이라고 자처하는 보수주의가 자신만의 관심에 몰두함으로써 기형의 신학이 생겨나게끔 방조했던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선교는 단순히 복음만을 전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예수의 선교방법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들은 영적 구원에만 온 정열을 쏟아 부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사회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은 어쩌면 누가 지적했듯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너무나 영적인 것만을 중요시한 결과라기보다는 병든 영성과 축복된 죄악의 표현인지 모른다. 만일 그 진단이 정확한 것이라면  한국교회가 필요한 것은, 단순히 수적 성장보다 영적 각성과 회개일 것이다. 그리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가지는 일일 것이다.

나의 요구에 이웃의 필요를 맞추는 것은 참된 사람과 관심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진정한 관심은 이웃의 욕구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장애인 선교의 당위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의 문제를 바랄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다.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즉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함이라고 한 장애인을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셨다(요9:3). 그러면서 예수님은 일생 이 땅에 소외 받은 자들과 함께 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셨다. 소외된 자들을 포함한, 이땅 모든 자들의 죄를 짊어지고 그 분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살아 나가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의식에는 장애인과 같은 소외 받은 자들이 과연 있었던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 교회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반성하며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외 받은 자들에 대한 참된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가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는 장애인 선교가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 그릇된 인식을 불식하고 장애인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장애인 선교를  위해 애쓰는 장애인 선교단체와 협조관계를 유지해 가면서 장애인 선교에 있어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나가야 할 것이다. 장애인이 자유롭게 교회를 드나들며 일반인과 함께 기쁨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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