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 그 아름다운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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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뉴스통합

수화, 그 아름다운 언어

by 정진한 2012.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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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 그 아름다운 언어날적이

2007/12/08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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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스물여섯. 청각장애인 영화감독.

2005년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농인독립영상제작단 '데프미디어'를 결성해 <친구>, <어느 애비의 삶>, <그림의 떡> 등 아홉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제작비는 한국장애인재단에서 지원받거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조달하고 있다. 곧 장애인이 근로현장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담은 단편영화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를 만난 건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만나기 전 우리는 시종일관 문자 메시지로 연락을 했다. 성수역 1번 출구 앞 편의점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잘 생긴 청년이 다가왔다. 그를 알아보았다는 뜻으로 나는 오른 손을 흔들었다. 드디어 얼굴을 마주 대했지만 만나기 전보다 소통은 더 어려워졌다. 사람을 옆에 세워놓고 문자메시지를 날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최소한의 수화는 준비했어야 하는데… 나는 참 예의도 없는 인터뷰어였다. 노트북만 믿고 그냥 나온 것이다. 그가 인도하는 대로 말없이 농아인협회 사무실로 따라가는 동안 그 시끄럽던 도시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 고요가 나를 더욱 부끄럽게 했다.
사무실 한 켠에 놓인 컴퓨터와 그의 노트북을 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대화를 하기 전, 그의 노트북에 있던 <그림의 떡>을 먼저 보았다. 청각장애인 청년이 엄정화를 좋아해서 그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는데 자막도, 수화 서비스도 안 된 영화를 볼 수 없어 매번 졸다가 나온다는 내용이었다. 15분 정도의 짧은 영화였는데 배우의 눈빛 연기도, 그것을 섬세하게 잡아낸 감독의 연출력도 인상 깊었다.
박 감독은 홍콩영화와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극장에서 자막 있는 외국 영화를 볼 때만큼은 청각 장애를 잊을 수 있어서 행복하단다. 개봉한 지 한참 지난 영화에 자막을 넣어 선심 쓰듯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는 비참하기까지 하다. 누구보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한국영화를 점점 더 멀리하게 됐다.

어려서 중이염을 앓아 청력을 잃은 그에게 부모님은 구화교육을 강요했다.
“구화교육은 상대방의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이해하는 언어예요. 손짓으로 수화를 하기 전까지 장애인이라는 게 들통 나지 않으니까 부모님이 구화교육을 시켰던 것 같아요. 수화를 못하게 하려고 손등을 때리고 혼을 내셨죠.”
미국에서는 청각장애아를 둔 부모는 일찍부터 수화를 배우는데 한국에선 어떻게든 말을 배워서 건청인처럼 되길 강요한다. 그건 수화가 하나의 독립된 언어이며, 문화적 언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무관심 속에서 수화는 청각장애인들만의 전유물이 되었고, 건청인들과 농인들을 동전의 양면처럼 가깝고도 멀게 만들었다. 수화가 이렇게 외면되고 있는데 영어조기교육이 붐이 일고 있는 현상을 보면 그는 허탈감을 느낀다.
“‘수화도 곧 언어’라는 인식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듯 수화를 보급한다면 지금처럼 청각장애인들이 소외되지는 않을 거예요. 수화교육은 어린이에게도 유익해요. 아동기에는 손을 많이 사용할수록 두뇌가 개발되잖아요. 미국에서는 유치원부터 모든 학교에서 수화를 기본적 교육언어로 인정하고 있어요. 그래서 미국 일반인들은 기본적인 수화는 할 수 있어요.”
최근에 방송이나 잡지에서 수화의 우수성을 접하고 나서야 그의 부모님도 수화에 마음을 열었다. 물론 그 동안은 부모와 반목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는 한때 제빵 기술도 배워보았지만 말이 안 통하는 그에게 돌아오는 건 허드렛일뿐이었다. 세상을 향한 울분이 쌓여가던 시간, 교회에서 우연히 캠코더를 손에 넣게 된 후 영화감독의 꿈을 갖게 되었다. 소리 없이도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는 걸 알고 새로 태어난 것처럼 기뻤다. 그후 기독교농아인방송의 비디오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며 야전에서 영화감독 수업을 쌓았다.
그는 두 달 전부터 오무토토마토에서 밤늦게 야간청소 아르바이트를 한다. 운 좋게도 청각장애인에 관심 많은 점장이 이력서도 안 보고 그를 채용했다. 점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그에게 수화를 배우고 있다. 그가 영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본사 마케팅팀에 지원을 부탁할 정도로 그를 신임하고 있다.

그는 최근에 유행하는 ‘인공와우 수술’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무엇보다 그 기술이 아직 제대로 검증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농아의 입장을 묻지 않고 부모의 강권으로 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보험 적용이 되면서 인공와우 수술이 무분별하게 시행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 대신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영화 자막지원이나 그 밖의 문화지원이 줄어드는 거죠. 우리 사회에서 수화만으로도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하다면 굳이 검증 안 된 수술을 하느라 건강보험 재정을 낭비하지 않아도 될 텐데… 너무 안타까와요.”
그는 지난 해 무분별하게 인공와우 수술을 강요하는 사회와 강요받는 아이들을 고발하는 영화 <인공와우>를 만들었다. 종종 청각장애인이 드라마나 광고에 등장하지만 청각장애인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 확인도 안 한 내용이 공중파 방송을 탈 때는 정말 기가 막힌다. 청각장애가 있어 수화를 사용하는 사람이 건청인의 말을 듣고 수화로 대답한다는 식이다. 수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너무 극단적이다. 한편에서는 수화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드라마의 언어로 차용하는데, 또 한편에서는 청각 장애를 드러낼까봐 수화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지와 무관심이 장애를 왜곡하는 현실을 볼 때마다 그는 영화창작에 추진력을 얻곤 한다.

토요일 오후에 그는 미국 수화와 브라질 수화 강좌를 듣고 있어 우리는 인터뷰를 그쯤에서 마쳤다. 그날 밤, 새벽 한 시. 그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와 메신저를 두드렸다.
그는 신학대를 다니다가 한 사람 때문에 수화통역사를 둘 수 없다는 학교 측에 배신감을 느끼고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했다. 주일에 미치도록 예배하고 싶지만 설교를 ‘볼’ 수 있는 교회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명절에 친척들이 모였을 때, 사촌들의 웃음 속에 섞일 수 없을 때,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 수화를 배우다 포기했을 때 가장 외로웠다고 고백했다. 그가 지나온 소리 없는 세월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청각장애인들은 소리가 단절되는 만큼 정보도 문화도 예술도 모든 면에서 단절돼 살기 때문에 사회에서 문화를 향유할 기회가 거의 없어요. 앞으로 수화로 대화하는, 제대로 된 농인영화를 만들어 그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어요.”
지금까지 그가 만든 영화는 농인들이 생활 속에서 겪는 애환을 다루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농인들과 건청인들이 함께 볼 수 있는 무성 영화를 만들 생각이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가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것처럼, 소리가 없이도 위대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그에겐 커다란 위안이다.

글 · 임지희(사과나무 '그가 아름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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