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훈한이야기 백리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하라. 경주최부자댁(감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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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훈훈한이야기 백리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하라. 경주최부자댁(감상태)

by 정진한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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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경주 최부자댁

경주 최부자댁은 경북 경주시 교촌에 위치한 가옥이다. 교촌은 신라시대 요석궁 터로 요석공주가 살았다고 한다. 최부자집은 최진사집으로도 불리웠는데 이는 가문에 전해지는 육훈(六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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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댁은 경북 경주시 교촌에 위치한 가옥이다. 교촌은 신라시대 요석궁 터로 요석공주가 살았다고 한다. 최부자집은 최진사집으로도 불리웠는데 이는 가문에 전해지는 육훈(六訓)에 따라 진사(進士)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화재로 현재는 안채와 천석곳간만 남아 있다.

12대에 걸친 만석꾼 집안

경주 최부자댁은 경상북도 경주에서 12대 동안 만석꾼을 배출한 집이다. 현재의 최부자댁은 교촌마을에서 5대 동안 정착하였지만, 최언경(1743~1840)이 1700년대 이곳에 터를 잡기 전에는 경주 최씨 파시조인 최진립 때부터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에 터를 잡고 7대까지 살았다. 내남면에서 7대, 교촌에서 5대에 걸쳐 전체 12대 동안 만석꾼의 가계를 꾸려왔다. 현재의 교촌마을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거처한 요석궁(瑤石宮) 터로 전해진다. 교촌이라는 이름은 경주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향교의 ‘교’자를 따서 부른 것이다. 교촌마을의 북쪽은 계림(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설화 배경), 남쪽은 경주 남산, 동쪽은 신라궁성인 월성이 위치하고 있다. 천년 고도인 경주에서도 교촌 마을은 신라의 중심지인데 그 곳에 조선시대 최부자집이 있었다.

경주 최부자댁 안채

화재로 안채와 곳간만 남아있는 최부자댁

경주 최부자댁은 1971년 처음 국가민속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는데 이때의 명칭은 '경주최식씨가옥'이었다. 2007년 ‘경주교동 최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가 2017년 ‘경주 최부자댁’으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종가가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는 ‘경주 최부자댁’이 유일하다. 경주 최부자댁의 형태는 기역(ㄱ)자 형의 사랑채, 디귿(ㄷ)자 형의 안채, 일(ㅡ)자 형의 중문간 행랑채가 있고, 별당과 천석곳간 그리고 사당이 있었으나 현재는 1970년 화재로 인하여 안채와 천석곳간만이 남아 있다.

경주 최부자댁 안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결정체, 경주 최부자댁 육훈

경주 최부자댁에는 육훈이라는 가훈이 내려오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마라
2.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마라
5.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6.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최부자댁은 만 석 이상의 소출이 생기면 소작료 배분방식을 바꾸어 종래의 소작료 5:5에서 6:4, 7:3과 같이 소작료를 낮추어 소작인에게 많이 줬고, 재산이 만 석을 넘지 않도록 하였다. 적절한 부를 유지하면서도 혼자만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고, 주변을 살필 줄 안 것이다. 이미 전통시대에 삶의 혜안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다. 

 

최부자댁의 마지막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씨 집안의 마지막 부자는 12대 최준(1884~1970)이었다. 최준이 활동하던 시기는 일제 강점기에 해당하는데, 최준의 집에 묵고가던 항일독립운동가들과의 교유를 통해 최준은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백산 안희제와 더불어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거액의 독립자금을 제공했다. 여기서 나온 자금은 임시정부의 필요 자금의 6할을 넘었다고 하니 대단한 기여라고 할 수 있다. 2018년 곳간채의 나무궤짝에서 발견된 자료들을 통해 최부자집의 구휼세부 내역, 독립운동가와의 네트워크, 백산상회와 관련한 독립운동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2020년 1월 경주에서는 최부자댁에서 2018년 발견된 독립운동관련 문서를 바탕으로 경주국채보상운동 학술대회와 전시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이 경주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경주에서의 국채보상운동 실체를 밝혔다. 최부자집은 군사정권 시절 전 재산을 들인 영남대(전 대구대)의 운영권을 삼성 이병철에게 넘겼고, 삼성은 1966년 한국비료 사카린밀수 사건으로 곤경에 처하자 영남대를 박정희 정권에 넘겼다. 이로써 최부자집의 부는 끝이 났다.

경주 최부자댁 사당
경주 최부자댁 곳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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