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인물 황충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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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삼국지 인물 황충 Three Kingdoms

by 정진한 2024.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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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황충

https://www.youtube.com/watch?v=i286OSZsATU

 

 

시호 : 강후

작위 : 관내후

최종직위 : 후장군

성씨 : 황

이름 : 충

자 : 한승 

생몰기간 : ?~220

 

老將說黃忠(로장설황충) 노장이라면 황충을 말하니
收川立大功(수천립대공) 서천을 얻을 때 큰 공 세우네
重披金鎖甲(중피금쇄갑) 쇄갑을 엄중히 걸치고
雙挽鐵胎弓(쌍만철태궁) 양팔로 철태궁을 잡아당기니
膽氣驚河北(담기경하북) 담력은 하북을 뒤흔들고
威名鎮蜀中(위명진촉중) 위명은 촉에 가득하네
臨亡頭似雪(림망두사설) 죽을 때 머리는 눈처럼 희건만
猶自顯英雄(유자현영웅) 영웅의 모습이 더욱 드러나네

 

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시대 촉한 유비 휘하의 무장.

형주 남양군 사람으로서, 는 한승(漢升).[1] 시호는 강후(剛候)[2]다.

익주 정벌과 한중 공방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여 유비의 영토 확장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명장으로 항상 앞장서서 적을 깨부수고 점령하여 그 용맹이 전군의 으뜸이었다고 한다. 그 용맹함과 사람됨, 높은 공로 덕분에 항장 출신이란 한계를 극복하고 만인지적이라 일컬어진 관우, 장비와 동렬에 서며 당대와 후대를 가리지 않고 큰 명성을 떨쳤다.

촉한의 인물들 중에서도 조운과 더불어 굳세고 강직하면서 인정이 두텁고 온화한 인품을 지녔기에 편입된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유비의 남다른 신임을 받았다. 동시에 《삼국지연의》를 통해 최고의 명궁이자 노장(老將)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

 

2.1. 유비를 따르기 전까지[편집]
형주목 유표가 그를 중랑장으로 삼고 조카 유반을 보좌하게 했다. 유반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인데, 그 이유는 유표가 영역 확장을 피하고 현상유지에 더 관심이 있었던 데 비하여, 그는 강동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유반을 경계한 손권은 태사자를 배치해 수비하게 했다.[3]

황충은 유반 아래서 유현을 수비하다가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한 후 조조에게 비장군직을 받고 장사태수 한현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2.2. 유비를 따르다[편집]
적벽에서 패한 조조가 형주에서 철수하고 유비가 세력을 확장하자 그를 따랐다.

황충은 유비가 입촉했을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항상 부하들보다 앞장서서 적진으로 달려가 용맹을 과시했는데, 그 공이 삼군의 으뜸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을 보면 많은 활약을 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선주가 대노하여 유장의 백수군독(白水軍督) 양회(楊懷)를 불러 그의 무례함을 질책하며 그를 참수했다. 이에 황충(黃忠)과 탁응(卓膺)을 시켜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도록 명했다. - 선주전
황충은 늘 앞장서서 적진에 침투하여 함락시켰고, 용맹하고 굳셈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 황충전
2.3. 한중 공방전[편집]
한중 공방전 때 황충은 말 그대로 맹활약을 했고, 법정과 협력하여 조조의 친족이자 조조군을 대표하였던 명장이자 외정사령관이던 하후연을 전사시키는 대공을 세웠다.

하후연의 전사 소식을 접한 조조가 친정에 나서자, 황충은 조조의 진지를 몰래 기습하여 적의 군량을 탈취하려 시도했으나, 성공 여부에 대한 언급은 기록에 없다. 부장이었던 조운이 염려했을 정도로 그의 귀환이 늦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 무사히 귀환한 것을 볼 때 별다른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안 24년(219년),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서 하후연(夏侯淵)을 공격했다. 하후연의 군대는 매우 정예했으나, 황충은 적의 예봉을 꺾어 어김없이 전진하고 사졸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징과 북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환성은 골짜기를 뒤흔드니, 한번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斬)하고 하후연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이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올랐다. - 황충전
건안 24년(219년) 봄, 양평에서 남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산(定軍山)에 영채를 세웠다. 하후연이 군을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선주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과 조공이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趙顒) 등을 참수했다. - 선주전
하후연이 패하자 조공(曹公)이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米)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黃忠)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군대가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4]를 나와 황충 등을 마중하며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 조운별전

정군산에서의 활약에 대해 과연 황충이 하후연을 직접 죽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어왔으나, "一戰斬淵"라는 표현만으로는 두 장수가 직접 무기를 주고받았다고 생각하기 부족하다. 여기서의 "斬"은 한 사람의 물리적인 공격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군사를 동원한 전투 중 하후연을 패사시켰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자세한 사항은 일기토 문서로.

한중 공방전에서의 하후연 전사 상황을 보면, 황충은 처음부터 하후연을 잡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조커였다. 먼저 유비가 하후연을 꾀어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1만 명으로 구성된 기습 부대들에게 장합이 지키는 방향인 주마곡 쪽의 위군 진영을 공격하게 명령하여 지속적으로 장합을 압박해 하후연에게 구원 요청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하후연이 본인 직속 정예부대의 절반을 장합에게 보내주게 만들고, 이 상황을 정군산에서 지켜보던 법정이 마침내 하후연을 칠 기회가 왔다고 유비에게 진언, 이 진언을 받아들인 유비가 곧바로 이 때를 위해 따로 대기하고 있던 황충과 그가 이끄는 기습부대에게 하후연을 공격하도록 지시, 이에 황충이 하후연을 급습하여 방어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던 하후연을 그대로 전사시켰다. 말 그대로 하후연이 장합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기습 공격으로 장합을, 장합을 구원 한다면 황충을 통해 하후연을, 즉, 적의 대장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잡는다는 법정의 치밀한 전략을 황충의 용맹으로 실현시킨 것이었다.

이 전투 후 황충이 곧바로 사정장군 중 하나인 정서장군[5]에 임명된 것만 봐도 이 때의 전공이 확실히 황충의 몫이었다고 볼 수 있다.
2.4. 사방장군[편집]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한 후에는 사방장군 중 하나인 후장군에 봉해졌다.[6] 이는 전장군 관우, 우장군 장비, 그리고 좌장군 마초와 동급의 위상을 얻는다는 뜻으로써, 황충이 전국구급 무장으로 대우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안에서도 차이가 있어서 마초, 장비는 가절[7]을 관우는 가절월[8]을 받지만 황충은 받지 못한다.

이때 제갈량은 관우는 형주에 있었기에 그가 공을 세우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으므로 자존심이 드센 그의 성격상 황충과 나란히 같은 대열의 관직 봉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 제지했지만, 유비가 직접 관우를 설득하겠다며 황충을 그대로 임명하였다. 역시나 관우는 강하게 반발하여 불편함을 드러내었으나, 비시가 고사를 인용하여 그를 설득하였고 관우는 마음을 고쳐먹고 관직을 받아들였다.

유비군 내에서 그 두 인물의 짬밥 차이가 굉장히 크게 나긴했다. 게다가 관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원에 명성이 자자하던 장수이기도 했고. 마초야 진작부터 이름 높은 군웅이었지만(그리고 그런 마초에 대해서도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누가 더 낫냐며 물었던 관우이기도하고) 황충은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장수였지만, 군웅 마초와 너무나도 널리 알려졌던 관우의 명성과 비교될 순 없었으니…

그러나 이는 바꿔 말하자면 관우만 제외하면 황충의 공을 직접 봤던 제갈량, 마초, 장비 등의 공신들은 편입된 장수 출신인 황충이 사방장군으로 임명되는 것에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제갈량도 형주목 관우의 반응을 우려했던 것 뿐이며, 그조차도 "(황충의 공을 직접 본)마초와 장비라면 황충이 자신들과 동렬에 서도 인정하겠지만..." 이라며 유비부터 시작해 관우를 제외한 군 상층부 인물들은 모조리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는 것을 기꺼이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선주가 한중왕이 되자, 그는 비시를 형주로 보내 관우를 전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관우는 황충이 후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격분해서 말했다.
"대장부는 평생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제수되었던 관직을 거부하였다.
비시가 말했다.
"왕업을 세우는 자가 임용하는 인물에게 하나의 기준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전한의 고조와 어릴 적부터 친한 교분이 있었고, 진평(陳平)과 한신(韓信)은 초나라에서 도망쳐 뒤에 한나라에 도착했지만, 관직의 순서를 정하는 논의에서는 한신을 가장 높은 지위에 있게 하였고, 이 때문에 소하와 조참이 원한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왕(漢王)은 일시적인 공로에 근거하여 한승(漢升:황충)을 높은 신분이 되게 했지만, 마음속의 평가가 어찌 군후(君候)와 동등하겠습니까! 게다가 한중왕과 당신을 비유컨대 그는 주군과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생각해 보면, 관호(官號)의 높고 낮음이나 작위와 봉록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그를 마음으로써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일개의 관리로써 명령을 받아 이를 시행하는 사람이지만, 만일 당신이 임명을 받지 않아 곧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 때문에 이와 같은 거동을 애석해 할 것이며, 아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는 크게 깨닫고 즉시 임명을 받았다. - 비시전
2.5. 죽음[편집]
한중에서 조위의 사령관을 참살하여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대공을 세운 것도 잠시 황충은 한중 공방전이 끝난 후 바로 다음 해인 2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사나 별전을 통틀어도 사인에 대한 서술은 남아있지 않으며, 때문에 불과 1년 전까지 전장을 휩쓸던 맹장이 어떤 이유로 죽었는 지는 아직도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따로 병이나 전상(戰傷)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에 나이가 많이 든 상태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느라 기력을 모두 소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오가는 상태. 가족에 대한 기록도 '그의 아들 황서가 일찍 죽어 후사는 없었다'라고 짧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9]

황충이 세상을 떠난 건 유비가 손오 정벌을 시작하기 일 년 전이었다. 따라서 연의에서처럼 황충은 손오 정벌에 참여한 바가 없다. 만약 황충처럼 용맹하게 일군(一軍)을 이끌 수 있는 재목이 유비를 수행했다면 이릉대전의 결과에 적잖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황충의 사망은 관우의 전사, 장비의 급작스러운 암살, 마초의 요절과 함께 유비에게 있어서는 뼈아픈 결과였다. 홀로 형주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한 관우를 제외한 나머지 넷은 익주 쪽에 있었는데 관우가 전사한 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1년 단위마다 황충, 장비, 마초 순서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들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살아있었다면 유비 혼자 이릉대전에서 전선을 감당하는 부담을 덜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이릉대전이 벌어질 무렵에 순차적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연의에서는 오호대장군, 정사에서는 관장마황조 열전으로 묶인 촉의 마지막 1세대 장수인 조운마저 1차 북벌 이후 사망하면서 유비 세력의 1세대 네임드들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하게 된다.

사후, 그에게 내려진 시호는 강후(剛侯)이며, 이는 일생을 용맹함으로 살아온 무장에게만 내려졌던 삼국시대에서 상당히 드문 시호다.[10]
3. 평가[편집]
정군산 황충 동상
정군산에 위치한 황충의 동상
황충, 조운은 굳세고 사납고 씩씩하고 용맹하여 아울러 조아(爪牙-발톱과 어금니. 임금 호위무사, 용맹한 심복 등을 뜻 함)가 되었으니 관(灌), 등(滕)의 무리로다.
진수 《정사 삼국지》
장군(將軍, 황충)은 돈후하고 웅장하여, 적군의 선봉을 부수고 난국을 극복하였으며, 공업을 세운 당대의 재간꾼이었다.
양희 《계한보신찬》, 황한승을 찬하며(贊黃漢升)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황충과 조운을 유비의 발톱과 어금니(爪牙)라 평하며 황충을 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었던 관영과 하후영에 비유하며 고평가를 내렸다. 촉의 신하인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도 황충은 성정이 돈후하고 웅장했으며 위기를 극복하고 공업을 쌓아 올린 인물이라 평했다.

이처럼 황충의 용맹과 무예, 그리고 무엇보다 그 높은 공적에 관해서는 당대 인물들은 물론 후세 역사가들까지 이견이 없다. 또한 사령관으로서는 그다지 검증된 바가 없는 조운과 달리 황충은 한 전선을 맡아 하후연을 참살하고 촉의 영토 확장에 누구보다 큰 활약을 펼친 명장이었다.[11] 여기다 진수가 인물에 대해 평가할 때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인품에 있어서도 전혀 비판하지 않았으며, 양희가 그의 성정을 극찬한 것을 보면 인품 또한 완성된 덕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12]

당시 편입된 장수들은 아무리 높은 공을 세워도 적정선 이상은 출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황충은 예외적으로 본인의 군공과 인품만으로 유비 휘하 최고의 장수들이었던 관우, 장비, 마초와 동렬에 서며 천하에 위명을 크게 떨쳤다. 제갈량이 직접 '황충의 공을 직접 본 장비와 마초라면 이에 승복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니 정사에 언급된 대로 익주와 한중에서 전군의 으뜸가는 공을 세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어떠한 사료에서도 패배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드넓은 익주 땅을 점령할 때, 항상 선봉으로 서서 가장 큰 활약을 선보였으니 수많은 전투를 치렀을 것은 당연한데, 그러한 기록들 중에서도 단 한차례의 패배나 후퇴 기록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정사 삼국지의 촉서 황충전 뿐만 아니라 선주전이나 방통법정전 및 위서 장합전에서도 교차 검증이 되는 사실로 그가 전투에 있어서 얼마나 무신에 가까운 존재였는지를 여실히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상과 같이 황충은 훌륭한 인품과 더불어 항상 병사들보다 먼저 적진에 돌격하는 솔선수범함, 병졸들을 고무하며 이끄는 참된 지휘관으로서의 태도, 장수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용맹함과 과단성, 끝으로 최고의 군사적 업적까지 보유한 조운과는 다른 의미에서 비판할 요소를 찾아볼 수 없는 난세를 이끈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4. 삼국지연의[편집]
《삼국지연의》에서는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촉장들이 늘 그렇듯 수많은 적장들을 쓰러뜨린 인간병기 역을 맡고 있으며, 정사에서 보여준 강인한 모습이 한층 강화되었다.

유비와의 만남도 보다 극적으로 묘사되었다. 형남정벌전은 적벽대전이라는 큰 이벤트 이후 유비세력이 형남 4군을 유비군의 간판급 명장들이 각각 정벌한다는 쉬어가는 전개이다. 대략적으로 남만정벌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그런 때 갑자기 황충이라는 맹장이 나타나 유비군 최강의 장수 관우를 상대로 선전하는 것이다. 즉, 형남 4군 정벌은 연의에서 황충이라는 새로운 스타 캐릭터의 데뷔전을 위한 포장이라는 것.(덤으로 위연도 합류.)

관우가 한현이 있는 장사성으로 침공하자 관우를 막기 위해 상대하다가 말에서 떨어졌는데도 자신의 패배을 인정하고 목을 치라고 하지만 관우는 다음에 말을 바꿔 타고 오라고 물러가줬다. 장사로 돌아온 황충을 한현이 활이면 간단히 끝날 것을 왜 굳이 일기토를 하냐고 꾸짖고 다음에는 활로 승부를 내라고 한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나 연의에서 찌질이 같이 묘사되는 한현은 의외로 자신이 아끼던 명마를 황충에게 아낌없이 내주는 모습을 보인다. 황충은 무장으로서의 은혜와 도리를 갚기 위해 또 다시 관우와 승부를 낼 때 활 꺼내 들었는데 처음 두 번은 헛발을 날리고, 이에 방심한 관우가 쫓아오자 일부러 그의 투구 장식를 활로 맞추었는데, 그제서야 관우는 황충의 궁술이 소문대로 대단하며 앞서 자신을 맞추지 않은 것은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를 본 한현이 황충이 관우와 내통한다고 의심하여 그를 가두었다. 그러나 위연과 평소 황충을 흠모하던 백성들이 봉기하여 한현은 위연에게 죽임을 당하고, 장사성은 그대로 함락된다. 그 이후 위연이 한현을 처단했음을 알리고 유비군에 투항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오히려 위연을 꾸짖고 자택에 근신하였다. 이를 안 관우와 제갈량 등이 반드시 황충을 설득해 수하로 삼아야한다고 거듭 권유, 유비가 친히 황충을 찾아가 스스로를 낮추며 함께해줄 것을 간청하자 그의 인품과 대의에 감화된 황충은 유비군에 귀순하였다.

Three Kingdoms


관우와 황충의 의기를 강조하는 일화지만 이것 때문에 훗날 관우가 황충을 대하는 태도에 모순이 생기기도 한다. 연의에서도 촉의 사방장군 임명 에피소드는 그대로 나오는데[13] 이때 관우가 황충과 같은 취급을 안 받겠다며 화내는 장면도 정사와 똑같기 때문이다. 분명히 장사에서는 서로를 동등한 적수로 인정하다가 나중에 오호장군에서 같은 대열에 서게 되자 정사와 똑같이 "황충 따위와 나를 세트로 묶다니!"라는 발언을 하기 때문에 현대인인 독자가 보면 어리둥절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장수로서는 그 역량을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 외 부분에서 자신과 동급으로 놓는다는 걸 인정할 수없다'라는 의미다. 한왕조는 고대왕조고 당연히 그 시대 사람들은 신분질서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황건적의 난 등으로 신분질서가 뒤흔들리는 시대이기는 해도 원소의 예처럼 명문가는 명문가의 혈족이라는 이유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시대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관우나 장비는 비록 신분이 미천하지만 같은 개국공신이자 군주의 의형제로서 유비군 입장에서는 최고급 귀족이다. 마초의 집안도 한왕실에서 대대로 한 지방을 맡은 높은 관직생활을 해온 혈통귀족이다. 따라서 마초가 유비군에 참가해온다면 오히려 마초 쪽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로 무게추가 마초 쪽으로 기운다.

그러나 황충은 지방관의 부하 무관이라는 미관말직에 불과하므로 형주 토착귀족을 회유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해도 자신과 같은 반열에 놓는다는 것을 관우가 고깝게 볼 이유는 충분하다. 실제 해당 일화에서 오호대장군의 자격을 논할 때 관우는 '장비는 내 아우, 조운도 오랫동안 형님과 함께 하였으니 아우와 다름없는 존재, 마초는 명문가 자제이니 나와 동격으로 취급할만 하다'고 무력이나 능력이 아닌 신분을 기준으로 삼았다. 관우가 고압적이며 권위에 매우 민감한 성질을 가진 것은 오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모멸적인 외교적 언사로 화를 자초하는 모습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인간적인 단점은 연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므로 개연성이 없는 전개가 아니다. 다만 이런 자부심에 따르는 지휘력과 무력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주므로 귀족적인 영웅상으로 그게 단점으로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혹은 장사 전투 이후 일어난 사건 때문에 관우가 황충한테 삐졌다는(...) 주장도 있다. 장사를 장악한 후 관우가 황충을 찾아갔으나 황충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고, 이후 유비가 직접 방문해서야 황충이 출사한 일이 있는데 관우가 이것때문에 황충에게 불만을 가졌으리라는 추측이다. 약간 어이없는 이유 같지만 관우 입장에서는 나름 인재라고 예를 갖추어서 방문했는데 문전박대를 당했으니 자존심 높은 관우 성격상 화가 났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서촉정벌에서도 활약했고 위가 한중 부근 국경을 집적거리자, 7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역시 고령의 엄안과 책사 법정과 함께 원군으로서 출진한다. 이 때 성도에 있던 촉장들도 한중에 나가 있던 유봉&맹달 등도 '원군이랍시고 온 게 늙은이들이라니'라며 그들은 물론 명령을 내린 제갈량까지 비웃었고, 황충 역시 이를 알고 있었기에 엄안과 함께 '늙은이의 진면목을 보여주자'라며 교병계와 반객위주[14] 등의 계책을 이용해 위의 군단장 하후연을 참살하는 큰 공을 세운다. 다만 아쉽게도 정사에서는 엄안과의 노익장 듀오가 등장하지 않는다.

최후마저도 이릉대전에서 관우의 원수인 반장을 공격하여 달아나게 만드는 등 용맹을 과시하며 활약하다 전장에서 멋있게 마무리지었다. 관흥과 장포가 공을 세우고 오자 유비가 "나를 보호하던 충성스러운 장수들은 모두 늙어 쓸모가 없어졌지만 두 조카가 큰 공을 세우니 기쁘구나"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 발언이 황충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이에 황충은 약간의 군사만 데리고 동오군을 공격하여 사적을 3합도 안 걸려 베고 반장을 패퇴시켰으나 관우의 원수를 갚는다고 관흥과 장포의 귀환 청을 거절했다가 이튿날 반장을 쫓다 복병에게 포위당해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관흥&장포의 구원을 받아 돌아오긴 했으나 위독했다. 유비가 황급히 찾아와 자신의 실언에 눈물을 흘리자, '이미 천수를 충분히 누렸다, 참된 주인을 만나서 기뻤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리고 유비는 "짐이 벌써 오호대장군 중에 세 사람을 잃었거늘 그 원수를 갚지 못 했다"며 통곡하고는 계속 진군하여 원수를 갚긴 하나,[15] 손권까지 죽이겠다는 집착이 화근이 되어 촉장 대다수가 전사하고 유비 자신도 무리하는 바람에 얼마 못 가 죽는다.

수하에게 암살당한 장비나 노환과 병으로 죽은 조운 및 마초와 비교했을 때 오호대장군 중에선 유일하게 관우와 맞먹을 정도로 장수다운 장렬한 죽음이었다. 실제로는 이릉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죽었고 사인에 대한 별다른 언급은 없다. 아마 노환이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을 듯하다.
5. 여담[편집]
연의 덕분에 황충에게 2가지 이미지가 정립되었는데, 첫째는 명궁, 둘째는 노장이다. 정사에서는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코에이사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언제나 최고의 궁술 실력을 가진 무장으로 나온다.[16] 실제로는 활보다 칼을 잘 썼던 것으로 보이는데, 연의 내에서의 묘사도 활보다 큰 칼로 적장을 해치우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가장 큰 전공인 정군산 전투에서도 하후연을 칼로 베어 죽였다. 노장 이미지로 인해 중국에서는 힘이 장사인 노인을 가리켜 황충이라고 하며 건강하고 정정한 노인의 상징이 되면서 늙었지만 여전히 대단한 장군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황충 이전에는 기전파목의 염파나 노익장이란 고사를 탄생시킨 후한의 복파장군 마원 등이 노장 이미지로 유명하였는데, 황충의 유명도 때문에 다 묻혔을 정도. 연의에서는 황충의 나이가 220년에 75세라고 나와있어 146년에 태어난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황충의 정확한 출생년은 미상이다. 오히려 노인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고 기록을 보면 호쾌한 맹장 느낌이 강한데, 이는 짧고 굵은 활약과도 맞물린다. 게다가 대를 잇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시대였는데도 황충은 후사는 커녕 처첩도 언급이 안된다. 늙은 장수였다면 가족 구성원이 많았을 가능성이 충분한데 황충의 가족은 요절한 아들 황서말고는 언급이 없고 이외 아들이나 손자, 심지어 양자조차도 언급되지 않으며 처와 첩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황충은 널리 알려져 있는 노익장의 이미지와는 오히려 거리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황충이 뒤늦게 자식을 얻게 된 걸 수도 있는데 "아들이 있었지만 요절하여 후사가 없다."가 기록의 전부이고 아들이 언제 죽었는지도 언급이 안 되니 젊은 시절에 얻은 아이를 잃고 다시 자식을 가지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정확한 생년 기록이 없으니 황충이 활약한 시점이 중년이었는지 노년이었는지는 확답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게다가 황충의 친척에 대한 기록이 미비하고, 귀족 가문의 경우 누군가 요절해서 대가 끊기면 가문의 조카를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하는게 관행이었는데 그러지도 못한걸 보면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자수성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황충이 노장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젊은 나이에 요절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태사자가 건창도위에 부임한 게 202년인데 황충은 그 시기 이전에 중랑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중랑장 정도의 벼슬을 약관의 나이에 꿰찼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황충이 중랑장을 20대에 역임했다고 해도 사망시에는 중년의 나이이기 때문에 젊은 나이는 아니다. 노장 이미지는 유비가 한중왕 즉위 이후 관우가 사방장군의 직위를 받을 때 황충과 동률에 있자 '이런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을 수는 없다!'며 분노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 큰데, 이 부분에 사용된 노병이라는 단어는 정황상 '늙은 병사'라는 의미보다는 '쓸모 없는 병사'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즉 관우의 말은 황충의 나이와는 전혀 상관 없이 '이 내가 이런 놈과 비슷한 대우를 받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라는 의미일 수도 있는 것. 이러한 여러 상황들을 조합해봤을 때 부실한 기록 속에서 억지로라도 황충의 나이를 굳이 유추해보자면 200년경에 이미 중랑장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 중랑장 정도 되는 관직이면 어지간한 전공 혹은 인맥 없이는 쉬이 오를 관직은 아니라는 점을 토대로 최대한 적게 잡아 30대 초중반 전후에 중랑장으로 임관했음을 가정했을 시, 155년생 조조 또래 내지 관우 또래로 보면 얼추 이해는 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활약하던 시대상인 217년경에 적어도 50대 중후반~60대 초중반 정도는 되었으니 당시 시대상으로 노장 취급은 받았을 터.[17] 사실 중랑장을 빠르게 달았을거란 보장도 없고 오히려 늦게 달았을 가능성도 있는데다 관우가 노병이라고 언급한 것을 감안하면 연의처럼 14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70살이 넘어서까지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생각 외로 오래 못살았는지의 여부 역시 황충의 출생년이 미상인만큼 확실치 않다.
노장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마찬가지로 노장인 엄안과 세트로 활약하기도 한다. 연의에선 이를 코믹하게 묘사하는데 이를 본 맹달이 유봉에게 '제갈량도 잠깐 머리가 돌았나 보오. 두 늙은이를 보내는 것을 보니 촉의 운명도 이제 다한 것 같소'라고 말한 것으로 서술한다. 이때 황충은 이 두 장수가 비웃은 것을 보고는 엄안에게 '늙었다고 업신여기는 듯한데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시다'라고 하니 엄안은 '장군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라는 대화를 나눈 것으로 서술한다.
황충은 같은 열전에 있는 관장마황조 중에선 가장 기록이 없는 장수이다. 관우, 장비, 마초, 조운은 각각 배송지가 여러기록을 가지고 본전에 주석을 붙여 넣었고, 특히 같이 관영, 하후영의 무리라고 평가 받은 조운의 경우엔 따로 사적을 모은 별전을 이용해서 내용이 매우 충실해졌다, 하지만 황충은 불행히도 별전류 같은 것도 없었는지 배송지가 아무런 주석을 붙여주지 못했다. 사방장군의 칭호를 받아 매우 용맹하고 무서운 장수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많은 공을 세워 조운과 함께 유비의 조아(爪牙)라 불리며 사방장군의 위치에 올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익주와 한중에서의 맹활약상이 없었다면 진도 같이 열전도 만들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제 그의 나이나 활약상, 어떻게 유비군에 들어갔고 그전까지 무얼했으며 정확한 유비군 내 위치가 어땠는지 등은 상당수 추측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는 1세대 인물들이 다 죽은 후에야 태어난 사람이라서, 가문이 아예 사라져버린 황충의 경우 조상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후손들이 없었기에[18] 진수의 시대에 이미 황충에 대해서는 수집할 수 있는 기록이 매우 적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나관중이 기록 자체가 부실한 황충을 한중 공방전의 활약과, 사방장군에 임명 된 것을 보고 본인의 상상력과 집필력으로 연의에서 '노익장', '명궁' 이라는 이미지를 붙여주어 오늘날 다른 오호대장군과 구분되는 황충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 준 것이 정말 대단할 정도다. 지방태수 휘하의 일개 장군으로 늙어가던 장수가 말년에 유비라는 명군을 만나 뒤늦게 비상하여 죽을 때까지 그 재능과 능력을 한껏 펼쳤다는 드라마틱한 각색은 나관중의 소설가로서 탁월한 역량을 엿볼수 있는 부분으로 삼국지 2차 창작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21세기의 작가들도 노장과 명궁 캐릭터성에 견줄만한 개성을 창작해내지 못하고 있다.
후대도 꽤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다고 봤는지, 남북조(南北朝) 시대 송(宋)나라와 양(梁)나라 사이의 이름 난 의약학자(醫藥學者)이자 도가(道家)인 도홍경(452년 ~ 536년)이 쓴 책중에는 고금도검록이라고 하여 당대까지 전해지던 명검들에 대해 다룬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황충은 한선주(유비)가 남군을 평정할 때 칼 하나를 얻었는데 피와 같이 붉었고, 한중에서 하후연의 군대를 공격할때 하루동안 손수 벤것이 백으로 헤아려야 할 정도였다.’ 야사의 내용이긴 하지만 저 책은 삼국연의가 나오기도 한참 전에 지어진 책이기 때문에 남북조시대부터 민간에서는 대단한 용장 중 하나로 평가되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
중국 경극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 중 하나인 정군산(定軍山)에선 거의 진주인공 취급. 늙고 기력이 쇠해 하후연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 말하는 제갈량에게[19] 분개하며 하후연을 베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이후 멋들어지게 하후연을 쓰러트리는 황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황충/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태평어람에 인용된 송본에 따르면 한숙(漢叔)으로 한승은 오자라고 한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 계한보신찬 등 그 외 모든 사료에서는 일관되게 한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2] 시법에서 강은 '수의불굴(守義不屈=의리를 지키며 굴복하지 않음)', '치과살적(致果殺敵=용감하게 적을 죽임)'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태사자는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나관중은 이게 아쉬웠는지 그가 장료와 싸우다 죽는 이벤트를 만들어 주었다.
[4] 圍, 군사 시설의 일종
[5] 우연의 일치인지 황충이 이 전투에서 참살한 위나라의 대장, 하후연의 최종 관직도 정서장군이었다.
[6] 연의에선 조운이 추가되어 오호대장군이 된다.
[7] 관리를 죽일 수 있는 직책이다.
[8] 가절 윗급 직책이다.
[9] 대를 잇는 것이 중요했던 시대인데 손자도 없었고, 양자도 없었던 것 때문에 황충이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황서가 제갈첨과 종회처럼 늦둥이일 수도 있고, 황충이 약관의 나이에 중랑장 벼슬을 달았다고 해도 사망 기준으로 최소 20년 이상 전장을 누빈 노련한 40대 장수에 해당하기 때문에 젊은 장수라고 생각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애초에 중랑장은 일군을 이끌고 항복한 장료나 만인지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장비조차 30대 전후에 받았을 정도로 결코 낮지 않은 관직이었다. 거기다 관우도 50대 중후반의 나이에 형주 공방전에서 싸우다 전사했는데, 황충이 그보다 어리다고 보기에는 무리다.
[10] 삼국시대 인물 중에선 이통, 장료와 더불어 황충까지 단 3명 뿐이며, 전한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고조 휘하의 개국공신 주발이 여기에 해당한다.
[11] 조운은 기본적으로 군영 감독관과 수도 방위군 및 황실 친위대 지휘관, 후방 군영 담당 및 최고사령관의 최측근이자 직속 돌격대장 등으로 활약했다.
[12] 진수는 같은 촉나라 1세대 대표장수들인 관우와 장비를 만인지적이라고 그 능력과 공훈을 칭찬하면서도 각각 오만한 성격, 지나치게 부하를 엄하게 대하여 화를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사실 그 성격적 결함들 때문에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했으니 당사자들도 할말 없지만. 변호할 부분이라도 있는 관우와 달리 장비는 실드의 여지가 거의 없다.
[13] 차이점이 있다면 여기에 은근슬쩍 조운을 밀어넣어 오호대장군으로 만들었다는 정도다.
[14] 손님인 척하면서 주인을 치는 것. 하후연 앞에 진을 치고서 우주방어로 일관하며 하후연 측을 피곤하게 만들다가, 법정의 신호에 따라 방심한 하후연을 급습했다. 다른 사례로는 유장의 손님으로서 들어왔다가 이런저런 갈등을 이용해 그대로 촉을 손에 넣은 주군 유비가 있다. 연의에서는 같은 유씨 운운하지만 정사에서 보면 효웅이 따로 없다.
[15] 반장은 관흥에게 참살되었지만, 마충은 수하인 미방&부사인에게 암살당하고 그 미방&부사인은 다시 촉에게 항복하려고 찾아왔다가 끔살, 장비를 죽인 범강&장달마저 손권이 화해의 선물(…)로서 잡아보내는 등 원수를 갚았다기보단 떠먹여줬다는 측면이 은근히 강했다.
[16] 참고로 라이벌 이미지가 있는 하후연 역시 삼국지 시리즈에서 궁술 쪽으로 조명받고 있다. 또한 하후연도 역사서에는 딱히 명궁이었단 언급이 없다. 지나가는 이벤트 수준인 조조군 장수들의 활쏘기 대회에서 다른 장수들이 과녁 가운데에 맞힌 것을 다시 맞혔다는 기록 정도가 전부다. 역사서에 활을 잘 쐈다거나, 활로 적군의 장수를 참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는 삼국지의 장수는 여포, 태사자, 방덕, 감녕 정도다.
[17] 삼국지에서 중랑장으로 임명된 인물들 중 대표적인 케이스가 황건적 토벌 당시 노식, 황보숭 등이 있다. 또한 유비 세력이 조조 밑으로 잠시 들어갔을 때 조조가 장비를 포섭하기 위해 준 벼슬이 중랑장이었는데, 이때 조조가 유비 본인에겐 무려 좌장군 벼슬을 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중랑장이란 벼슬이 꽤 무게 있는 관직임을 알 수 있다. 20대 후반에 중랑장에 오른 장료의 경우 여포가 패망할 당시 자신의 군을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한 인물이었으므로, 이 공헌도가 인정되어 높은 벼슬을 받은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저런 특별한 사연이나 인맥이 있다는 기록이 없는 황충이 자신의 전공만으로 중랑장 직위에 올랐다면, 202년 당시 절대 젊은 장수였을리는 없었을 것이다.
[18] 후손들이 기록한 조상의 행장 등은 조상을 공적을 부풀리기 위한 허풍과 과장을 감안하면서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는 있지만, 어릴적 개인사 같은 부분은 다른데서 구하기 힘들고 인용할 가치가 있는 1차 사료이다.
[19] 물론 황충을 자극시키기 위한 말일 뿐이었다.

 

Three Kingdo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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